제목 없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보이는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선생의 행적(行蹟)

 

중종 34/08/01(을축):

석강에 나아갔다. --- 기사관(記事官) 백인걸(白仁傑)은 아뢰었다.

"기묘인(己卯人)이 화를 입은 후로 선비들의 학문이 오랫동안 폐해졌습니다. 기묘인이 사람됨은 좋지 못하더라도 그 학문만은 의리의 학문에 칭탁했는데, 그 후 나이 젊은 무리들은 그때 사람들이 한결같이 중한 죄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는, 그 사람들의 잘못한 것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학업한 일까지도 모두 그르게 여겼기 때문에 드디어 학문하는 일을 폐했던 것입니다. 조정에서 큰 화를 여러번 겪는 동안 폐습이 이미 이루어졌으나, 위에서 조처하신다면 어찌 효과를 얻지 못하겠습니까.”
【원전】 18 집 322 면

중종 36/03/20(병오):

간원이 아뢰기를,“홍문록(弘文錄)은 국가의 중대한 선임(選任)이므로, 반드시 사림(士林) 가운데 명망이 있는 자를 가려서 장차 학사(學士)의 직임에 임명하기 때문에 정밀하게 선택하려고 하며 많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가려 뽑은 사람이 19명에 이르렀는데,【김진종(金振宗)·이여(李헯)·오겸(吳謙)·김저(金썚)·윤희성(尹希聖)·권물(權勿)·이천계(李天啓)·김개(金鎧)·김인후(金麟厚)·박세후(朴世煦)·이현당(李賢?)·백인걸(白仁傑)·이중열(李中悅)·민기문(閔起文)·허백기(許伯琦)·유지선(柳智善)·이사필(李士弼)·이담(李湛).】 전에는 이렇게 지나치게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난잡하다는 비난이 없지 않으니 다시 고쳐서 뽑도록 명(下命)하여 그 선임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18 집 450 면

중종 38/08/10(임오):

김광철(金光轍)을 한성부 우윤에, 이해(李瀣)를 승정원 좌승지에, 이찬(李澯)을 좌부승지에, 유진동(柳辰仝)을 사간원 대사간에, 구수담(具壽?)을 홍문관 부제학에, 송기수(宋麒壽)를 사헌부 집의에, 이황(李滉)을 사간원 사간에, 이순형(李純亨)과 진복창(陳復昌)을 장령에, 권물(權勿)과 정희등(鄭希登)을 지평에, 백인걸(白仁傑)을 헌납에, 심봉원(沈逢源)과 이담(李湛)을 정언에 제수하였다.
【원전】 19 집 9 면

중종 38/08/13(을유):

헌부가 아뢰기를,“우윤(右尹) 김광철(金光轍)은 본디 중론(重論)이 있었으므로【심언광(沈彦光)에게 붙었다.】 거두어 서용(敍用)한 것만으로도 과분한데, 이제 우윤이 되었으므로 물정이 지극히 해괴하게 여기니, 체직하소서. 수령을 맞이하고 보내는 비용은 다 백성에게서 나오는데, 올해의 농사는 전혀 결실하지 못하였습니다. 헌납(獻納) 백인걸(白仁傑)【남평 현감(南平縣監)이었다.】은 이달 초에 그 어미를 모시고 임소(任所)에 갔는데 이제 체직되어 온다면, 새 수령을 맞이하고 옛 수령을 보내는 폐단이 전보다 훨씬 더하여 한 고을의 백성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잉임(仍任)시키소서. 덕천 군수(德川郡守) 조승성(曺承晟)은 본디 재능이 없고 나이도 늙어서 일을 처리하지 못하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답하였다.

“김광철은 물의가 그러하지만 우윤은 아경(亞卿)의 유가 아니니, 체직할 것 없다.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원전】 19 집 10 면

중종 39/02/27(병신):

전라도 관찰사【송인수(宋麟壽).】가 남원 부사(南原府使) 오겸(吳謙)과 남평 현감(南平縣監) 백인걸(白仁傑)의 선정(善政)을 치계하니, 한 자급씩 올려주라고 명하였다. 【계본은 다음과 같다. --- 인걸은 공무에 청렴하고 신중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부지런히 보살폈습니다. 학당(學堂)을 세우고 학장(學長)을 두어 그 고을 자제들을 가르치며, 공무를 보는 여가에 친히 나가 학업을 권장하는 등 지성으로 가르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책 읽기를 즐거워했습니다. 이웃 고을에까지 그 소문을 듣고 배우러 오니, 진심으로 교회(敎誨)하여 강론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원전】 19 집 52 면

인종 01/03/22(갑신):

홍언필을 영경연사로, 백인걸(白仁傑)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원전】 19 집 216 면

인종 01/05/02(계해):

양사(兩使)가 사정전(思政殿)에서 사제(私祭)를 지냈다. 양사가 제사를 지내려 할 때에 상이 우승지(右承旨) 송기수(宋麒壽)를 보내어 감히 감당할 수 없다는 뜻으로 사양하니, 답하기를,“중국이 그대의 나라를 대우함이 중국과 다름 없으니, 우리들도 조정(朝廷)을 같이 한 사람입니다. 사사로이 제사하려는 것은 본디 모두가 정에서 나온 것이니 의리에 있어서 무엇이 해롭겠습니까.”하였다. 가우주(假虞主)를 신위(神位) 대신으로 설치하려 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사신은 논한다. 사신으로서 외국에서 사제를 지냈는데, 곽방(郭?)은 환자(宦者)이므로 예절을 모르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장승헌(張承憲)은 곽방에게 끌려서 지냈으니, 그래도 예절을 안다 하겠는가.】

【또 사신은 논한다. 중종(中宗) 두 글자는 중국에서 꺼리는 것인데, 혹 사제할 때에 두목(頭目)들이 뒤섞여 어지럽게 드나들다가 우주(虞主)를 가까이 보고 그 사실을 헤아려 알고서 중국 사신에게 고하면 일이 헤아릴 수 없게 될 것이므로, 우선 그 부득이한 조치를 취하려 했던 것인데, 끝내 탈을 잡는 변고가 없었고 도리어 그만 두어야 할 형세가 있었으므로 그만둔 것이다.】

이보다 앞서, 지평(持平) 백인걸(白仁傑)과 정언(正言) 유창문(柳昌門)이 와서 아뢰기를, “사신이 사제할 때에 가우주(假虞主)를 다시 만드는 것은 인정(人情)과 도리에 있어서 다 매우 미안하고, 제사가 끝난 뒤에 처치하기도 어렵습니다. 사신이 사제하는 것은 본디 정례(正禮)가 아니니, 저들이 거행하려 하더라도 이를 말리는 데 어찌 그 구실이 없겠습니까. 마땅히 말하기를 ‘황제가 사제(賜祭)하니 은총이 이미 지극하다. 황제의 명이 아닌데 어찌 사신의 사제(私祭)를 다시 받을 수 있겠는가. 소방(小邦)은 감히 감당할 수 없다. 조사(詔使)의 정은 두터우나, 우리의 예로서는 반복하여 생각하여도 결코 받을 수 없으니, 더 헤아리기 바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번 간절히 말하면 따르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니, 반드시 청한 대로 허락받아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가우주를 만들어 놓는 것은 나도 미안한 줄 아나, 형세가 어쩔 수 없다. 사제는 이미 회의하여 정하였으니, 임시하여 고쳐 정하기도 지극히 어렵다.”하였다.
【원전】 19 집 238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