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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보이는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선생의 행적(行蹟)

 

선수 00/07/17(경오):

그때 중국(中國)에 시호를 청하기 위하여 청(廳)을 개설하고 행장(行狀)을 짓게 하였는데, 대신들이 사적(事蹟)을 참고하기 위하여 사고(史庫)를 열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사관(史官)은 사고 여는 것을 꺼려 하여 양사(兩司)와 함께 보지 말 것을 아뢰어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화(史禍)가 있을까를 징계하는 뜻에서였던 것이다.

윤두수(尹斗壽)를 대사간으로, 백인걸(白仁傑)을 홍문관 교리로 삼았다. 인걸은 인품이 고매(高邁)하고 성품이 소광(疎曠)하면서 강개(慷慨)한 기절(氣節)이 있었다. 젊은 시절 조광조(趙光祖)를 스승으로 하여 그의 집 곁에다 서실(書室)을 꾸미고 거기에서 배우다가 광조가 화를 당하자, 사귀어 놀던 벗들을 모두 사절하고 문닫고 들어앉아 자리 곁에다 구용(九容)·구사(九思)를 써 붙여두고 3개월을 지냈다. 그후 그의 친구인 신거관(愼居寬)이 그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그대의 용모(容貌)와 사기(辭氣)가 그전에 비하여 크게 달라졌는데, 어떻게 수양을 쌓았기에 그리되었는가?” 하였다. 그는 오랜 후 어버이가 늙고 집이 가난하여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당시 김안로(金安老)가 국정을 요리하던 때라서 기묘의 당파란 배척을 받고 겨우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로 있다가, 안로가 패한 후 비로소 사관(史官)이 되었다. 명종 초기에는 간관(諫官)으로서 바른 말, 바른 논리로 당시 사람들이 꺼리던 일을 지적하여 바로잡았다. 혼자서 밀지(密旨)의 잘못됨을 아뢰었다가 그 때문에 하옥(下獄)을 당하고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우연히 그를 구제한 자가 있어 죽음을 면하고 향리로 방환(放還)되었다가 윤원형(尹元衡)이 패한 뒤에 그 당시 상참(常參)에 서용(敍用)되었다. 이때에 맨 먼저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는데, 나이는 71세였다. 얼마 후 그는 직제학(直提學)에 승진되고 이어 승지(承旨)로 발탁되어 조야(朝野)의 기대가 컸고, 상 역시 그를 소중히 여기었다.
【원전】 25 집 403 면

선수 00/10/05(병술):

김명윤(金明胤)이 죄가 있어 관작을 삭탈하였다. 당시 삼사(三司)가 명윤에 대하여 논하자, 상은 그가 늙었고 또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하여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았는데, 기대승(奇大升)이 경연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명윤은 이랬다저랬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으로 봉성군(鳳城君)이 죽은 것도 사실은 명윤 때문이었으니 조정에다 둘 수는 없다.’고 하자, 상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명윤이 젊어서는 착하다는 명망이 있어 현량(賢良)으로 추천되어 기묘년 현량과에 발탁되었고, 그 후 현량과가 없어지자 다시 거업(擧業)에 종사하여 시장(試場)에서 급제하였다. 그는 진취(進取)에 급급하여 남의 시비도 돌보지 않고 을사 사화(乙巳士禍) 때 권간(權奸)들 뜻에 맞추어 윤임(尹任)이 봉성군 이완(鳳城君李?)·계림군 이유(桂林君李瑠)를 추대하여 대위(大位)를 넘보려 한다고 무계(誣啓)함으로써 하늘에 닿을 큰 화단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명종 말년에 와서 뭇 권간들 세력이 꺾이자 그때는 또 명윤이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을사년 여당(餘黨)들이 억울하게 당한 자가 많으니, 바라건대 그들에 대하여 조금 신설(伸雪)을 하소서.’ 하면서, 조식(曺植)·이항(李恒) 등을 대간(臺諫)으로 삼을 것을 청하기도 하였으므로 사림은 그의 농단(壟斷)에 대하여 분개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삭직(削職)만 당하고 목숨을 보존한 것을 시원치 않게 여겼다.

인종(仁宗) 초기에 대간(臺諫)이 기묘년 사화 때의 억울하게 당한 자들을 신설해 줄 것을 아뢰었는데, 그 아뢴 내용에, ‘기묘년의 사류(士類)들은 모두가 정직한 사람들이었다.’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백인걸(白仁傑)은 그 대목을 말소할 것을 청하면서, ‘임금은 털끝만큼도 속여서는 안 된다. 기묘 당시 어진 사람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천거과(薦擧科)가 없어진 후 책보(冊?)를 짊어지고 장옥(場屋)에 들어갔던 자도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 것인가?’ 하였으니, 그것은 명윤(明胤)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인걸이 언젠가는 명윤을 면전에서 배격하기를, ‘그대야말로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다.’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꼭 맞은 말이라고 하였다.
【원전】 25 집 405 면

선수 01/01/01(신해):

상이 경연에 나아가 《논어(論語)》를 강하였다. 기대승(奇大升)이 아뢰기를,

“요즘 제기된 공론(公論)에 대하여 대간(臺諫)이 역쟁(力爭)을 않은 것도 아니고 대신들 역시 공론에 따라 아뢰었는데 상께서는 사사건건 망설이시니, 이는 언로(言路)를 열어주는 뜻이 아닙니다. 임금이 만약 대간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누구도 말을 하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심이 해이될 것입니다. 상께서도 그대로 습성이 되어 그것쯤 무엇이 그렇게 해가 되랴 하신다면 그것은 크게 두려운 일인 것입니다. 지난날 김명윤(金明胤) 사건으로 양사(兩司)가 연계(連啓)하였으나 오래도록 소청을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에 대신들도 아뢰었던 것입니다. 삼대(三代) 이상은 잘 모르지만 한(漢)나라 이후로는 대신의 건청(建請)에 있어 임금이 들어주지 않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대신들의 말이 맞지 않으면 그를 물리치는 것이 옳지만 그 자리에 있게 한 이상 그의 말을 따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대신도 알고는 말을 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대간은 존중하여 대우를 해야 하고 대신은 더욱 존중하여 대우해야 합니다.

일을 논의할 즈음에 모든 것을 충분히 참작하여 처리하신다면 시끄러워지는 폐단은 자연 없을 것입니다. 나랏일의 폐단을 일시에 다 고칠 수는 없는 일이니 마땅히 점차적으로 논의를 거쳐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먼 지방에 폐단이 있어도 그것을 들을 길이없습니다. 지금은 상께서 즉위하신 원년이니 선왕조의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구언(求言)의 전지를 내리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또 주강(晝講)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임금이 치화(治化)를 일으키려면 우선 자기 자신을 닦아야 할 것은 물론이려니와 마땅히 인재를 모으는 데 급급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집을 짓기 위하여는 먼저 재목(材木)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20년 이래 참혹한 사화(士禍)로 인하여 선배(先輩)들은 모두 몰락이 되었고 후생(後生)들은 학문에 힘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학교(學校)의 정사를 닦아 밝히고 인재를 배양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국가의 치란(治亂)과 민생의 휴척(休戚)에 대하여 아는 자가 배출된다면 나라의 묵은 폐단들도 개혁할 수 있을 것이며 미처 못했던 일들도 차차 보수해 거행될 것입니다. 중종(中宗) 말년에 인재가 많았었는데 불행히도 사림(士林)들이 화를 당하여 살아남은 자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 중에는 20년 귀양살이 속에서도 학문을 폐지하지 않고 있다가, 지금 비록 은총을 입고 조정에 들어와 있으나 그들은 이미 노년이어서 만약에 순차적으로 천서(遷?)할 경우 미처 크게 쓰이지 못할 염려가 있으니, 이 역시 현자 등용의 방법이 아닙니다. 뚜렷이 드러난 인물이라면 순차에 관계없이 등용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는 백인걸(白仁傑)·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김난상(金鸞祥)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또 아뢰기를,

“중종조 때에는 감사(監司)가 향교(鄕校)의 제생(諸生)들에게 《소학(小學)》을 강독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신도 제생으로 있던 시절 그것을 계기로 《소학》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을묘 왜변(乙卯倭變) 이후로는 감사들이 다시 선화(宣化)에는 뜻이 없고 오직 군기(軍器)만을 검열할 뿐입니다. 만약 사표(師表)가 될 만한 자를 발탁하여 방면(方面)의 임무를 맡기신다면 학풍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원전】 25 집 408 면

선조 01/01/13(계해):

직제학 기대승의 아뢴 바에 따라 전교하기를,

“태평한 정치를 일으키고자 하면 반드시 인재를 모아 어진 선비와 함께 다스려야 한다. 지난 중종 말년에 인재가 많이 나왔으나 불행하게도 사림의 화가 있어 무고하게 죽고 남은 자가 많지 않았다. 20여 년 귀양살이 중에도 오히려 학문을 폐하지 않고 곤궁과 환난 중에도 변절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그들 중에 어떤 자는 나이 70이 넘었고 어떤 자는 60이 넘었으며 어떤 자는 60에 가까운데 지난번 선왕(先王)의 유지에 따라 원한을 씻어 주고 수용(收用)하여 다시 벼슬길을 터주었다. 옛날에는 어진 사람이면 혹 뽑아 대관(大官)에 제수하기도 하였다. 지금 이런 연로(年老)한 사람들은 학문이나 절개나 다 널리 권장하기에 합당한 사람들인데, 차례대로만 등용하면 아마 미처 쓰지 못할 사람도 있을 것이며 또한 어진 사람을 우대하는 도리도 아니다. 이런 뚜렷한 사람은 발탁하여 임용할 것을 이조(吏曹)에 내리라.” 하였는데, 나이가 70이 넘은 사람이란 백인걸(白仁傑)을 가리키고, 60이 넘은 사람이란 김난상(金鸞祥)을 가리키며, 60에 가까운 사람은 유희춘(柳希春)과 노수신(盧守愼)을 가리킨 것이다
. 【원전】 21 집 187 면

선수 01/02/01(신사):

대비(大妃)가 상에게 정권을 돌려주었다. 당시 해 위에 홍훈(虹暈)의 변이 있었는데 대비가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여주(女主)가 정사를 하면 비록 모든 일이 다 제대로 되더라도 대본(大本)이 바르지 못한 것이어서 나머지는 족히 보잘것이 없다. 하물며 꼭 다 잘되지도 않는 경우이겠는가. 일변(日變)이 일어난 것은 진실로 미망인(未亡人)이 청정(聽政)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고는 즉시 발[簾]을 걷도록 명하였다.【이보다 몇 달 전에 백인걸(白仁傑)이 대비는 정권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준경에게 말하니, 준경이 말하기를 ‘임금의 대권(大權)은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으니, 우선 몇 달 더 두고 보더라도 늦지않다.’ 하였다. 인걸이 어느날 입시하여 고사(古事)를 말하면서 정권 반환의 뜻을 슬쩍 비추었는데, 대비가 이미 그 말을 받아들였다.】
【원전】 25 집 409 면

선조 01/02/14(갑오):

정사가 있었다. 직제학 기대승을 동부승지로 삼고, 노수신(盧守愼)을 특별히 명하여 직제학으로 삼았다. 이때 정청(政廳)이 아뢰기를,

“전일 뚜렷하게 학행이 높은 사람은 신원하여 수용해 불차로 뽑아 쓰라고 하신 일은 사체가 중대하니,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사유를 갖추어 계품하였는데, 직이 당상에 있는 자는 현직(顯職)을 주고 당하에 있으면서 학행이 높은 사람은 당상으로 주의할 것을 하교하셨습니다. 또 대신과 의논하라고 하셨으므로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직급이 당하인 사람을 당상으로 주의하는 것은 바로 법외(法外)의 특이한 일로서 삼대(三代) 이후로는 이런 일을 시행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전(大典)》에 ‘홍문관 관원으로서 직제학 이하에 빈 자리가 있으면 출사(出仕)한 개월 수를 헤아리지 않고 차례로 벼슬을 옮긴다.’ 하였으므로 전에 자급(資級)에 구애받지 않고 특별히 승천(陞遷)을 명한 적도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불차로 뽑아 쓰는 일인 것입니다. 경연의 진강을 돕는 것이 가장 절실하니 학문이 있는 사람을 홍문관 관원으로 삼아 차차 승천시켜 오래도록 강석(講席)에 둔다면 반드시 성학에 도움이 많을 것입니다. 또 조종조에서는 혹 직급이 3∼4품에 있을지라도 위에서 특별히 당상직에 제수한 사람도 있었으니 지금도 이같이 하면 사체에 합당할 것입니다.

또 인재를 뽑아 쓰는 권한은 해조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은명(恩命)은 당연히 위에서 나와야 합니다. 지금 해조가 자급을 헤아리지 않고 차례를 넘어 의제(擬除)하면 정사의 체통에 흠이 있을 것이니 실로 미안합니다. 의당 뽑아 쓸 사람이 직급에 있는 자라면 해조가 당연히 우선 올려 쓸 것입니다. 그중 나이 70을 넘은 자란 백인걸(白人傑)을 가리키고 나이 60을 넘은 자란 김난상(金鸞祥)을 가리키고 60에 가까운 자란 노수신(盧守愼)과 유희춘(柳希春)을 가르키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다 높이 장려하여 등용되지 못한 탄식이 없게 해야 할 것이고, 또 그중 노수신은 물의가 학행이 최고라고 하니 마땅히 먼저 불차 탁용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급은 종4품만을 줄 수 있고 정4품 이상의 직은 상의 특명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일이 아니라서 즉시 봉행할 수 없으니 매우 황공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고, 곧 노수신을 직제학으로, 김난상을 홍문관으로 응교로, 윤원례(尹元禮)를 선공 부정(繕工副正)으로 삼았다.
【원전】 21 집 189 면

선조 01/02/18(무술):

박순을 대사헌으로, 백인걸을 대사간으로, 김난상을 집의로, 이담(李湛)을 사간으로, 이충작(李忠綽)·박희립(朴希立)을 장령으로, 유희춘을 홍문관 응교로, 권극례(權克禮)·이이(李珥)를 지평으로, 정언지(鄭彦智)를 헌납으로, 구변(具?)·권징(權徵)을 정언으로 삼았다.
【원전】 21 집 189 면

선조 01/02/24(갑진):

상이 경연에 나아가니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좌의정 권철(權轍), 대사간 백인걸(白仁傑), 집의 김난상(金鸞祥), 응교 유희춘(柳希春), 수찬 정철(鄭澈), 도승지 김귀영(金貴榮)과 주서(注書)·검열(檢閱) 2인이 입시(入侍)하였다. 자리에 앉은 다음 이준경이 아뢰기를,

“재변이 일어나는 것이 어떤 일 때문이라고 지적할 수는 없으나, 옛글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것은 억울한 옥사(獄事)가 많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을사년의 옥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상께서 다 아시는 일인데 김저(金?) 등 13인에게서 적몰(籍沒)한 물건을 아직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옥사는 명종(明宗)이 어리시어 전혀 간섭하지 못하였고 윤원형(尹元衡)·이기(李?) 등이 구중 궁궐에 깊이 계시는 문정 왕후(文定王后)를 속여서 억울한 옥사를 만들었던 것이며, 기유년 충주난(忠州亂)의 정범(正犯)이외에는 모두 나이 어린 아이들이 회문(回文)을 가지고 장난한 것인데 죄다 죽이고 유배시켰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좌상(左相)도 곁에서 말을 도왔다. 자전(慈殿)이 이르기를,

“내가 부인으로서 수렴 섭정(垂簾攝政)하면서 국사에 마음을 다하였으나 큰 강령을 바루지 못하였다. 저번에 황해도 일변(日變)의 보고로 인하여 곧 은퇴하고자 하였는데, 지금 또 이런 변괴를 당하였으니 오늘 정사를 돌려주려고 한다. 내가 그전에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읽었는데 ‘부인은 음식을 주관할 뿐이니 국가로서는 부인에게 정사를 간여시킬 수 없고 가정에서도 가사를 주관시킬 수 없다.’ 하였으며, 또 송나라 조 태후(曹太后)는 기한보다 먼저 정사를 돌려주니 사관이 아름답게 여겼다. 나는 뜻을 결단하였다.” 하니, 영상·좌상·백인걸이 다 그 미덕을 따랐다. 자전이 이르기를,

“을사년에 죄를 입은 사람에게는 적몰한 것을 돌려주고, 노비가 된 처자와 기유년 충주의 옥사에 연좌되어 유배된 무리는 다 놓아 주라.” 하니, 신하들이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삼가 자전께서 깊이 겸양하시어 수렴을 거두고 정사를 돌리시며, 원통한 자를 생각하여 무고한 죄를 씻어 주시는 것을 보니, 오늘 이미 천심을 돌렸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또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꼭 무도한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가 있는 시대라도 천심은 임금을 사랑하여 때로는 재변을 보여 경계하고 반성하게 합니다. 상(商)나라 중종(中宗) 때에 상곡(桑穀)이 아침에 나서 저녁 때에 한 아름이 되게 자라자 중종이 무함(巫咸)의 말을 잘 채 용하여 두려워하며 덕을 닦아 감히 태만하고 안일하게 하지 않으니 상나라 도가 다시 일어 나 75년간이나 나라를 향유하였고, 은 고종(殷高宗)이 성탕묘(成湯廟)에 제사지낼 때 날던 꿩이 솥귀에 올라 울자 고종이 조기(祖己)의 말을 채용하여 정사를 잘 바루고 감히 태만하 거나 안일하게 하지 않으니 은나라의 도가 다시 일어나 59년간이나 나라를 향유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옛 성왕(聖王)은 재앙을 만나면 두려워하며 덕을 닦 고 일을 바루었으므로 재앙을 고쳐 상서로 만들었다.’ 하였습니다. 한 문제(漢文帝)는 삼대(三代) 이후의 어진 임금이었으나 즉위한 지 5년 만에 지진이 일 어났습니다. 선유(先儒) 호인(胡寅)이 말하기를 ‘문제(文帝) 시대에 이런 큰 이변이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이유는 천지(天地)의 이변은 한 가지 이유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 이 아니니, 다 사람이 한 일 때문이라고 하면 견강부회하여 막혀서 통하지 않고, 다 기수(氣 數)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하면 옛사람이 덕을 닦고 일을 바루어서 재앙을 상서로 바꾼 경 우도 또한 적지 않다. 요컨대 임금은 천지를 부모로 삼으니, 부모가 크게 노하여 낯빛이 이 상하면 자식은 마땅히 두려워하며 부모의 노여움을 풀어드릴 것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요, 부모의 노여움이 정성(情性)에서 일어난 것이라 하여 가만히 있을 수만을 없다. 문제 때에 이런 변괴가 있었으나 문제가 곧 몸소 덕화(德化)를 닦으며 낭비를 하지 않고 백성을 보살 폈으니, 이것은 바로 이변이 있어도 그 응보(應報)를 없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 다. 방금 민생의 폐단을 조정 신하들이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 수군(水軍)이 첨사(僉使)와 만 호(萬戶)에게 수탈을 당하여 지탱하지 못하고 도망가며 각 고을에서는 일족(一族)이나 겨린 [切?] 또는 그들의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을 침책하여 드디어 온 동네가 텅 비게까지 되었습 니다. 신은 첨사와 만호를 중등이고 하등이고 간에 그중 청렴하여 군졸을 감싸고 사랑하는 자가 있으면 각기 포상하고, 수령에게도 그와 같이하면 아마 징계가 되고 권장이 되어서 군 민(軍民)에게 조금이나마 혜택이 미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평안·황해·경기 등의 삼로(三路)는 중국 사신의 왕래가 번빈하여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세(田稅)는 이미 특별히 면제를 받았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세 (稅) 이외에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공부(貢賦)를 감사(監司)에게 물어 면제해 주면 백성 들이 또한 조금의 혜택이나마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신의 소견입니다.” 하니, 자전이 이르기를, “군신 상하가 마땅히 힘써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원전】 21 집 189 면

선조 01/05/16(을축):

최옹(崔?)을 우승지로, 백인걸(白仁傑)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원전】 21 집 193 면

선조 01/05/17(병인):

상이 내일은 덕흥 군부인(德興君夫人)의 소상(小祥)이지만 대통을 이었 기 때문에 근신을 보낼 수 없으니 다만 궁중에서 예물을 준비하여 내시를 보내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는데, 대사간 백인걸은 근신을 보내 제사해야 한다고 청하였고, 대신은 다 옳지 않다고 하였으므로 중사(中使)만 보내 자위(慈?)께 제사지내는 것을 돕도록 하였다.
【원전】 21 집 193 면

선수 01/07/01(무신):

백인걸(白仁傑)이 병을 이유로 귀향【파주(坡州).】하였다. 인걸은 지기 (志氣)가 보통이 아니었고 과감한 말을 잘하였다. 당시에 기대승(奇大升)·심의겸(沈義謙)이 명망이 있었는데 인걸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기대승은 너무 자신만만하여 반드시 나라 일을 그르칠 것이다. 심의겸은 외척(外戚)으로서 어떻게 정사에 간여할 수 있는가? 지금 선비들이 대개 의겸과 서로 좋게 지내고 있는데, 외척의 권세를 너무 키워서는 안 될 일이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자들이 인걸이 공격할 뜻을 가지고 있는가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비들은 인걸을 일러 선(善)을 질시한다고 떠들어댔으므로, 인걸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게 된 것이다. 혹자가 인걸에게 ‘왜 물러가느냐.’고 묻자, 인걸은 ‘나의 학술(學術)이 부족하여 나아가더라도 어찌해볼 수가 없다.’ 하였다.
【원전】 25 집 410 면

선조 01/07/26(계유):

송순(宋純)을 우윤(右尹)으로, 백인걸(白仁傑)을 공조 참의로, 유희춘을 홍문관 응교로, 오건(吳健)을 정언으로 삼았다.
【원전】 21 집 196 면

선조 02/04/15(무자):

백인걸(白仁傑)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원전】 21 집 204 면

선수 02/01/01(을사):

백인걸(白仁傑)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인걸이 물러가자 상이 그의 풍절(風節)을 그리워하여 누차 교지를 내려 그를 불렀으나 그는 병을 이유로 굳이 사양하였는데, 이때 특명으로 그의 질(秩)을 올려 헌장(憲長)으로 삼았다. 인걸이 세 차례 사양하자 상이 수찰(手札)로 그에게 답하기를, “군자라면 왕정(王庭)에서 선악(善惡)을 밝혀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고 후세에 준칙(準則)을 세워야 옳은 것이다. 만약 한마디 말에 속박되어 물러나 멀리 가버린다면 그것이 어찌 선비가 할 도리이겠는가. 경의 해와 달처럼 밝은 충성과, 얼음과 서리처럼 냉엄한 절의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알고 있다. 사양하지 말고 빨리 조정으로 달려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니, 인걸이 배명(拜命)하였다.
【원전】 25 집 413 면

선조 02/06/06(무신):

상이 문정전(文政殿)의 주강에 나아가 《논어》 양화편(陽貨篇)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번에 ‘윤원형(尹元衡) 시대에는 직언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우리 나라 사람은 본래 중국만 못하다.’【6월 7일에 심의경(沈義謙)이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기력이 없고 나약합니다. 중국에서는 엄숭(嚴嵩)이라는 자가 바야흐로 뜻을 얻어 제멋대로 악행을 저지를 때, 직간하던 신하가 살육당하는 것을 추응룡(鄒應龍)이 목도하고는 피하지 않고 직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왕조에서는 20년 동안 한 사람도 말한 자가 없었습니다.’ 하니, 정탁(鄭琢)이 아뢰기를 이 말이 맞습니다.’ 하였고, 윤근수(尹根壽)는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국토가 한쪽 변방에 치우쳐 있어 품성이 후하지 못한데, 중국 사람들은 쇠약하고 혼란한 세상을 당할 때마다 일컬을 만한 선비가 많이 나왔습니다. 엄숭이 권력을 전횡하자 급사중(給事中) 양계성(楊繼盛)이 엄숭의 죄를 논했다가 살해되고 왕숭무(王崇武)는 유배되었지만 끝내는 추응룡이 탄핵의 상소를 하여 축출하고 말았습니다. 윤원형이 국권을 잡고 있을 당시 신하 중에 그 누구도 그의 죄를 말한 사람이 없었으니, 살기를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함이 극심하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의 분부는 대개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을 내가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의논이 바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뒤 폐단이 끝이 없으리라 여겨진다.” 하니, 기대승(奇大升)이 아뢰기를,

“아뢰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발언이 과격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품성은 본디 후박(厚薄)의 차이가 없는 것인데, 우리 나라가 중국보다 반드시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는 것 같고, 그것을 공식 석상에서 버젓이 이야기한다면 편벽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른바 ‘윤원형 당시에 그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한 것은 분격해서 나온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중국의 경우는 엄숭(嚴嵩)이 바야흐로 활개를 칠 때에 직언을 하다가 죄를 받는 자가 계속 나오는데도 피하지 않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는 권간이 국권을 잡았을때 초야의 선비만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조정에서 국은을 받은 자로서 혹 그 간당의 무리인 줄 몰랐거나 그 하수인 노릇을 한 자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만, 당시 선인(善人)으로 좀 칭찬을 받던 사람들도 역시 발언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고 구차하게 부귀의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잘못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근래에 풍속을 갑자기 잘못되었습니다. 조종조에서는 악한 자를 배격하고 선한 자를 포양(褒揚)했기 때문에 연소한 사람에게까지도 지나치게 베푼 일이 많았고, 성묘(成廟) 때에는 사림의 기운을 배양했기 때문에 폐조(廢朝)의 무오(戊午)·갑자(甲子)의 사화를 겪으면서 사림들이 타격을 받은 것이 극에 달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중묘(中廟)의 반정(反正) 후로 10여 년 동안 국사에 면려하여 사기(士氣)가 면면히 이어져 오다가 그뒤 윤원형이 권세를 잡으면서 인심이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상께서 위에서 계셔서 마음속에 품은 바를 모두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최근 20여 년 동안 친구나 향당 간에서 직기(直氣)의 선비를 보기 드물게 되어, 옳지 못한 일을 보더라도 말하지 않으며 혹 어떤 사람이 그 일을 논하면 소란을 피운다 하고 모든 일에 누구나 간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당대의 잘못된 풍습을 민망해 한 나머지 격하여 한 발언이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위에서는 당대 풍습의 잘못된 점을 아시어 강대(剛大)하고 직방(直方)한 기운을 배양하셔야 합니다. 한(漢)나라 말기에 강대하고 직방한 기운이 흉악한 무리에게 꺾인 나머지 순숙(荀淑)의 발언이 손순(遜順)했기 때문에 그 자손이 거꾸로 조씨(曹氏)의 신하가 되고 말았습니다. 중용(中庸)의 도는 오직 성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마땅히 기절(氣節)을 뇌락(牢落)하게 가져서 강어(强禦)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평소에 얼굴색과 언사를 바르게 한 연후에야 환란에 임하여 절개를 지켜 의리에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신은 항상 친구간에 말하기를 ‘우리들 사이에서 말을 곧게 하고 얼굴색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임금 앞에 나아가서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는가.’ 하였습니다. 현세의 풍습이 이미 잘못되어 있으니 어떻게 절개를 지켜 죽음으로 의리를 지키는 신하들을 많이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의 일은 모르겠지만 전조(前朝)가 쇠란하고 위망에 직면했을 즈음에 윤원형보다 심한 간인(奸人)이 없지 않았건마는 그래도 역시 정직(正直)한 선비들이 있었으니, 이를 보면 사람의 성품이 구획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전조의 일로 전교하시니 매우 감격스럽습니다. 소신의 혼미하고 용렬한 의견으로는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조의 기강이 바야흐로 문란해졌을 때 우리 태조(太祖)께서 동정 북벌(東征北伐)하시어 생민들을 크게 구제하심으로써 하늘이 명을 내리고 백성이 귀의하게 되었으니 이치상으로 나라의 주인이 되심이 당연하거늘, 고려의 신하들 중에는 부지해 보려다가 끝내 안 되자 마침내는 절개를 지켜 죽은 사람도 있고, 대간의 신분으로서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않다가 죄를 입어 죽은 사람도 있으며, 혁명한 후에도 은퇴하여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 조정에 벼슬은 하면서도 그 당시의 기개와 절조가 범연치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유배되고 죽임을 당한 명사들이 많았는데도 뒷 사람들은 위축되지 않고 모두들 떨쳐 일어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무척 안타깝고 염려되는 일이 있습니다. 풍속이 급격히 크게 잘못된 데로 돌아가 한때의 숭상하는 풍조가 모두 말하지 않는 것을 현명한 것으로 삼아온 지 거의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사대부 중에도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자는 서로 추천하여 좋은 관직을 대부분 점거하고 있기 때문에 근래에는 국가에 큰일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친구간에 탄핵하여 논박하는 일은 소소한 것이라도 역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종조의 일을 듣건대, 평소에 서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도 탄핵하여 논박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종조(世宗朝)에 하연(河演)이 영상 겸 이조 판서가 되고 최부(崔府)가 이조 판서가 되어 정사(政事)로 서로 비난하자, 대간이 상의 앞에 나와 논핵하기를 ‘최부는 말할 것도 없지만 하연도 잘못입니다.’라고까지 하였는데 이 때 하연과 최부는 상의 앞에 있으면서 황공하여 숨을 죽이고 있다가 밖에 나와서야 얼굴빛이 펴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반박하는 말이 있으면 반드시 ‘무슨 마음을 먹었기에 이런 말을 하는가? 이 사람은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이처럼 풍속이 잘못되어 있으나 위에서 어떻게 그 곡절을 알 수 있겠습니까.

윤원형이 권세를 잡고 있을 때 당시 정승이라는 자들도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으며 양사의 장관을 모두 그 문하의 인물들로 삼았으므로 공적인 일에 있어서만 가부를 논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약간만 어떤 의향을 내비쳐도 사람들이 모두 미리 그 뜻에 영합하여 성사시키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첩의 아들을 허통(許通)시키는 일만 해도 원형이 약간 의향을 드러내 보이자 다른 사람들이 앞서 날뛰며 성사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악행이 쌓여 오래 되어 명종(明宗)이 그의 흉악하고 사특함을 환히 알게 되면서 싫어하고 괴로와하는 기색이 없지 않자 사람들이 위의 뜻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논박하여 아룀으로써 죄를 주게 되었으니, 명종이 만약 악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어떻게 그를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의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아뢴 말이【우리 나라 사람은 중국만 못하다고 한 말을 가리킨 것이다.】 뭔가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점을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주상께서 임어(臨御)하신 지 이제 3년이 됩니다. 여러 신하들 가운데 밖에 있어 소원(疏遠)한 자들은 아실 수 없겠지만 혹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하는 재상이나 대간·시종의 사람들이야 상께서 무슨 일인들 모르시겠습니까. 대개 현재의 풍습은 모두 말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 과오가 없겠습니까. 과오에 대해서는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 과오를 공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할 경우, 듣는 자는 성을 내지 않아야 하고 말하는 자는 꺼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하는 자가 꺼리고 듣는 자가 성을 낸다면 비록 과실이 있어도 입을 꼭 다물고 말하지 않다가 큰 잘못이 있게 된 연후에야 책벌이 따르기 때문에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중 궁궐의 상께서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반드시 입시하는 신하들이 계달한 연후에야 아실 수 있습니다. 위에서 반드시 아신 뒤에야 정사와 교화가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니 각별히 유념하소서. 치도(治道)를 물어 보시면 현재의 일도 알 수 있고 신하의 현능(賢能) 여부도 분변할 수 있습니다.

송(宋)나라 때 부필(富弼)은 훌륭한 정승이었습니다. 부필이 말하기를 ‘임금은 별다른 직임이 없고 다만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 것으로 직임을 삼아야 한다. 군자와 소인이 같이 있게 되면 군자가 이기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이다. 군자가 이기지 못하면 몸을 이끌고 물러나 태연히 도를 즐기는 생활을 하지만, 소인이 이기지 못하게 되면 온갖 방법으로 선동하고 얽어매어 반드시 이기고 난 뒤에야 그만둔다. 그리고 그가 권세를 잡고 나면 마침내 선량한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해독을 끼치게 되니 그때 가서 천하가 어지럽지 않기를 구한들 가능하겠는가.’ 하였습니다. 후세의 임금된 자는 이 점을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군자와 소인의 변별이 없다면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군자와 소인 사이는 마땅히 밝고 엄하게 변별한 뒤에야 정치의 효과가 이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향기로운 풀과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악초가 같이 있게 되면 악취만 있게 되고, 곡식을 심고 가라지를 제거하지 않으면 좋은 곡식을 해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도 반드시 군자를 돕고 소인을 막은 뒤에야 국사가 옳게 되는 것입니다.

옛적에 육지(陸贄)는 위 아래의 정의(情義)가 통하지 않는 것을 논하면서 제거되지 않은 아홉 가지 폐단을 말했습니다. 이른바 아홉 가지 폐단이라는 것은 위에 여섯 가지가 있고 아래에 세 가지가 있습니다.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 허물 듣기를 부끄러워하는 것, 변명하며 합리화시키는 것, 총명함을 자랑하는 것, 위엄으로 겁주는 것, 강퍅한 행위를 제멋대로 하는 것, 이 여섯 가지는 임금에게 있는 폐단입니다. 아첨하는 것, 거취를 결정하지 않고 형세를 관망하는 것, 겁내며 두려워하는 것, 이 세 가지는 신하에게 있는 폐단입니다. 위에서 이기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아첨하는 말을 달갑게 여기고, 위에서 과오를 듣기를 부끄러워하면 반드시 직간(直諫)을 꺼리게 마련이니, 이렇게 되면 아첨하는 자들이 그 뜻을 순종만 하게 됩니다. 위에서 한사코 변명을 일삼으면 다른 사람을 말로 꺾고, 위에서 총명을 자랑하면 다른 자들이 속인다고 미리 생각하게 마련이니, 이렇게 되면 형세를 관망하는 자들이 스스로 편하게 여깁니다. 위에서 위엄으로 겁을 주면 반드시 자신의 뜻을 낮춰 아랫사람들을 접하지 못하게 되고, 위에서 마음대로 강퍅한 행위를 자행하면 반드시 허물을 뉘우쳐 고치려 하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겁내며 두려워하는 자들이 죄를 피하게 됩니다. 이중에서도 허물 듣기를 부끄러하는 것과 총명함을 자랑하는 폐단은 옛날부터 영명한 군주일수록 더욱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고, 신응시(辛應時)가 아뢰기를,

“신돈(辛?)이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할 때 온 조정이 그를 추종하였는데 유독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만이 상소하여 그를 논박했습니다. 그런데 윤원형 당시에는 임금이 고립되었는데도 조정의 뭇 신하들 중에 한 사람도 간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추와 이존오는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우리 나라 사람이다. 상소만 한 것이 아니고 조정에서 욕까지 하였는데 신돈은 자기도 모르게 상(床)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다. 그러니 우리 나라 사람이 어찌 중국보다 못할 리가 있겠는가. 이 의논은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말한 것일 뿐이다.” 하였다. 기대승이 이뢰기를,

“성상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시니 지극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어찌 옛 사람들보다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위에서 요(堯)·순(舜)·탕(湯)·무(武)의 업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시고 신하들도 역시 성현을 스스로 기약하며 기질(氣質)상의 편벽된 점을 제거할 수 있다면 세도(世道)가 좋아질 것입니다. 아뢴 말씀이 과격한 벌언으로 잘못된 이론이었는데 위에서 깊이 그 병통을 아셨으니 진실로 우리 나라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김종직(金宗直)이 조의제강중문(吊義帝江中文)을 지었다가 대죄(大罪)를 받았습니다만 그 글에 ‘중국은 넉넉하고 우리 나라는 모자라는 것이 아니다. 어찌 옛날에는 있었는데 오늘날에 없어지겠는가.’ 하였으니 이 말은 매우 바른 논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윤원형이 당시에 그렇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대승이 아뢰기를,

“별 다른 일이 없습니다. 윤원형에 대한 일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듣고 본대로 아뢰겠습니다. 윤원형은 소시적부터 사특하고 악독하여 사류(士類)에 용납되지 못하였으므로 출신(出身)한 후에도 모든 천망(薦望)하는 직임에는 허락받지 못하였는데, 그 때문에 원한이 뼈속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인묘(仁廟)께서 동궁이 계시는데 원손(元孫)이 없으니 종사(宗社)가 마침내 군(君)으로 있는 명종(明宗)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을 윤원형이 다분히 품게 되었는데 공론에 용납받지 못하는 자들이 또 가서 그와 결탁하였습니다. 인묘가 바야흐로 동궁에 계시는데 다른 마음을 가진다면 인신(人臣)이 아닙니다. 조정의 선류(善類)로서 그 누가 이런 생각을 품겠습니까. 그런데 윤원형은 대윤(大尹)·소윤(小尹)의 설을 지어내어 현사(賢士)로서 동궁에게 기대를 거는 자들을 대윤의 무리라고 일컬었고, 중묘(中廟) 말년에는 경연 석상에서까지 이 논의를 끄집어내었는데, 중묘께서 듣고는 크게 노하시어 윤임(尹任)을 유배시키고 윤원형을 파직시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지극히 성명하신 중묘께서 선처하신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신하들이 시의(時宜)에 통달하지 못하고 ‘지금 무단히 죄를 준다면 뒤 폐단이 있을까 두렵고 외간(外間)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하는 바람에 중묘께서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윤원형은 뒤에 도승지에서 참판으로 승진하였는데 논박을 받고는 마음속으로 분을 품었습니다.

윤원로(尹元老)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사특하고 악독한 인물입니다. 명종 즉위 초에 문정 왕후(文定王后)께서 조정이 화평해야 한다는 전교를 내리자, 대신이 계달하여 윤원로를 방출했는데 이로 인하여 을사(乙巳)의 사화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윤임은 악행이 쌓여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니 이 사람을 죄주기만 했다면 괜찮았을 텐데 이기(李?)와 임백령(林百齡)·정순붕(鄭順朋)의 무리들이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까지 아울러 귀양보내고는 곧 이어 사사(賜死)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고변(告變)으로 인하여 끝내는 모반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웠는데 당시 학문했던 사람으로 이언적(李彦迪)이나 권벌(權?) 같은 이들이 어찌 추호인들 윤임에게 붙을 리가 있겠습니까. 유인숙도 선사(善士)였다고 하는데 그 때의 사람들이 평소의 유감과 원한을 가지고 마침내 대죄(大罪)을 빚은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무정보감(武定寶鑑)》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뒤로는 조금만 비난하는 의논이 있어도 곧장 대죄로 얽어맸기 때문에 참봉 성우(成遇)는 죄가 없으면서도 죽임을 당했고, 허충진(許忠眞)은 유생의 신분으로 형을 받는 화를 입고 방출을 당하는 등 죄를 받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니 그 누가 자기 몸을 잊고 감히 말하였겠습니까. 대간과 시종은 항상 윤춘년(尹春年)과 윤인서(尹仁恕)·진복창(陳復昌)이 맡아서 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큰 화란을 일으켰으니, 그 사이에 비록 가슴으로 개탄하고 분개하는 충신과 의사가 있다 해도 임금은 구중 궁궐에 계시므로 제 몸을 돌아보며 말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전라도 안서순(安瑞順)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상소하여 송인수(宋麟壽)라는 어진 선비가 원통하게 죄를 잘못 받은 정상을 말했다가 집에서 체포되어 끌려와 대정(大庭)에서 신문받고는 형을 받고 죽었으며 사련자(辭連者)도 모두 중죄를 받았으니, 국가에 오늘이 있게 된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진(秦)나라 2세 황제 때 정선(正先)이라는 자가 당시의 일을 비난했다가 죄를 받았는데 그 뒤 조고(趙高)의 세력이 더욱 성해지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진나라의 패망을 정선이 재촉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한두 사람 말하는 자가 있었다 해도 한갓 살해만 되었을 것이니 또한 무슨 유익함이 있었겠습니까. 뒤에 임백령(林百齡)의 시호를 문제삼아 스스로 트집 잡을 단서를 얻었다고 생각하고는 전정(殿庭)에서 신문할 것을 청하였는데 명종께서 그 간교함을 아시고서 박순(朴淳)과 박근원(朴謹元)을 의시관(議謚官)이라 하여 다만 파출할 것을 명하였으므로 그들의 기세가 저지되고 억제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호를 의정한 해는 언제인가?”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신유(辛酉)년입니다. 박순은 응교였고 박근원은 부응교였는데 봉상시(奉常時)에서 시호를 의정할 때 임백령에게 달리 일컬을 만한 일이 없기 때문에 공소(恭昭)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뒤에 충헌(忠憲)으로 개정하려는 의논이 있음을 듣고 정부에서 고쳐 의망하여 계문할 때 공소라는 시호도 함께 써서 들였는데, 위에서 하문하시기 때문에 그 틈을 타 원훈(元勳)을 비난하여 논했다는 이유로 큰 죄를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호에 대한 일을 위에서 짐작하기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공소로 먼저 정했어도 바로 충헌으로 고쳤다면 위에서 무슨 일로 하문했겠는가?”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봉상시에서 시호를 정하고 나면 정부에서 마감(磨勘)해서 전계(轉啓)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윤원형의 은근한 뜻을 알고 고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마침내 충헌으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입계할 때에 공소라는 호도 같이 써서 들였기 때문에 위에서 하문했다고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윤원형이 첩을 처로 삼은 뒤에 하루는 명종께서 지나가는 말로 묻기를 ‘옛날에 첩을 처로 삼았던 때가 있는가?’ 하니, 입시한 여러 신하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위에서 이미 그의 죄악을 알고 물었던 것인데도 신하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금시초문이다. 그렇다면 당초에도 쟁론하는 사람이 없었단 말인가?”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어떻게 쟁론하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신해(辛亥)년에 윤원형이 우상이 되었는데, 문정 왕후도 연소하다고 하고 윤원형도 또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하여 사퇴하고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삼사(三司)에서 논계하여 ‘현자를 이 자리에 두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소신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그 소(疏)를 가져다 보니 과연 소차 등록(疏箚謄錄)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아뢰기를,

“그 사람이 지금도 있는가?”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소신이 동료들과 함께 이 소를 보고 ‘시세가 어려우면 벼슬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영원히 더러운 이름을 남길까 두렵다.’고 하니, 연소한 동료들도 웃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혹 현재 있는 사람이라도 한두 사람이 웃사람의 명령에 승순하여 창도하고 나서면 그 나머지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따르게 될 것이니 사기(士氣)를 배양해야만 하겠다.”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지금까지 전해오는 말로는, 김안로 당시에 허항(許沆)이 누구를 논박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일제히 모이기를 청하여 그 일을 처리했는데, 당시의 부제학도 무슨 일인지를 몰라 ‘오늘은 무슨 일이 있는가?’ 했다 하니, 세상이 잘못되면 일이 모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안로가 패망할 때 누가 주장했는가?”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김안로는 험악하고 사특하여 사류(士類)에 용납되지 않아 기묘(己卯) 연간에는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가 그 뒤에 들어와 이조 판서가 되었습니다. 인물이 사특하고 악독하여 남곤(南袞)도 그를 두려워하여 축출했던 것인데 다시 들어와서는 선량한 사람들을 죽이려 하였고 희릉(禧陵)을 옮기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시 문정 왕후(文定王后)가 국모였을 때인데 또 폐립(廢立)하려는 의논이 있어서 그 화가 인주에게까지 닥치게 되었으나 중묘(中廟)께서는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그 방도를 몰랐습니다. 그러자 척리(戚里)의 사람들이 그런 뜻을 알고는 대간(臺諫)에게 말하여 아뢰게 하니, 중묘께서 즉시 금부(禁府)에 명하여 잡아 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하고, 신응시(辛應時)는 아뢰기를,

“그런데 대간(大奸)을 죄줄 때 척리(戚里)의 손을 빌렸기 때문에 척리들의 위세가 저절로 무거워지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마치 옛사람들이 말한바 ‘집안에 있는 도척(盜?)을 쫓아 내려고 양호(陽虎)를 불러 온다.’는 것과 같으니, 여우나 삵괭이가 물러난 대신 범과 이리가 들어온 격이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양연(粱淵)이 김안로를 제거하고 나서 중묘께서 그에게 과도하게 위임하여 장차 국사를 멋대로 독단하는 일이 있을 뻔했는데 그만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당시의 처치한 것이 비록 정대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김안로에게 죄를 준 다음에는 기묘인(己卯人)들을 이끌어 진출시켜 정광필(鄭光弼)도 등용하였으니 이는 끝내 선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김안로가 그의 아들 김희(金禧)를 공주에게 장가보냈으니 어찌 반연(攀緣)할 길이 없었겠습니까. 이행(李荇)이 정승으로 있으면서 김안로를 끌어 들여 대제학으로 추천했으니 이미 우익(羽翼)이 이루어졌고 허항(許沆)과 채무택(蔡無擇)은 곧 그의 복심(腹心)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안로가 패망하게 될 때 이 사람들이 모두 상(喪)중에 있었기 때문에 도모해 제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임금은 마땅히 처음을 삼가 소인을 예방해야 하니, 국사를 그르치고 나서는 또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그러나 척리들의 손을 빌렸기 때문에 뒤 폐단이 이루어지고야 말았으니, 을사년(乙巳年)에 문정 왕후의 밀지(密旨)가 있게 된 까닭도 척리들이 지휘한 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중학(中學)에서 일제히 모여 당시의 인물들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는데, 그 때 대간으로서 연소하고 기절(氣節)있는 사람들이 그 불가함을 주장하다가 드디어는 대죄(大罪)를 입게 되었습니다. 유희춘(柳希春)과 김난상(金鸞祥)은 당시 정언이었고 백인걸(白仁傑)은 헌납이었는데, 다행이 죽게 되지 않았지만 모두 적당(賊黨)으로 몰려 죄를 받았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인걸도 윤원형을 추고하려 하다가 양사(兩司)에서 모두 체직되고 끝내는 옥중의 몸이 되었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위에서 그가 무죄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 죄가 이에 그쳤던 것입니다.” 하고, 신응시는 아뢰기를,

“한(漢)나라 때 두무(竇武)가 현자였기 때문에 진번(陳蕃)이 힘을 합쳐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니, 척리 중에도 현능한 인물만 있다면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두무는 현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같이 일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현능하기만 하다면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척리뿐만이 아니다. 동한(東漢) 때에는 두헌(竇憲)을 제거하려고 정중(鄭衆)과 모의를 하였다. 두헌이 결국 죄를 받았으나 동한도 이 때문에 망하고 말았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시초를 삼가지 않으면 종말에도 반드시 도모하기 어렵게 됩니다. 한 장제(漢章帝) 때 두헌은 공주(公主)의 전지(田地)를 빼앗기까지 하였습니다. 헌에게 죄가 있음을 알면서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화제(和帝) 때에 와서 이러했던 것입니다. 임금의 자리는 어려운 것이니 마땅히 깊은 못을 건너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하여 조금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군자가 조정에 있게 되면 소인이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만 소인을 안다는 것이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웃사람의 뜻을 승순하는 사람은 매우 두렵게 대해야 합니다. 옛적에 당 태종(唐太宗)이 대궐의 후원에 있는 어떤 나무 밑에서 쉬면서 그 나무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우문 사급(宇文士及)이 덩달아서 예찬하여 마지않았습니다. 이에 당 태종이 말하기를 ‘위징(魏徵)이 언젠가 나에게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라고 권하였는데, 나는 누가 아첨하는 자인지를 몰랐다. 네가 아닐까 의심하였는데 이제 보니 과연 틀림이 없구나.’ 하였습니다. 그런자 우문 사급이 고두(叩頭)하고 사죄하면서 은미(隱微)하고 완곡한 언사로 대답을 하니, 태종이 그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옛날부터 영명하고 특출한 군주도 소인의 술수 속에 빠졌던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폐단은, 무사 안일주의에 빠져 녹봉(祿俸)이나 받으려 하고, 추종자를 받아들여 뇌물을 먹으면서 일생을 보내려는 사람이 매우 많다는 점에 있습니다. 최근 들어 선과 악을 분명히 구별하여 선한 자에게 후하게 하고 불선한 자에게는 박하게 하니, 이러한 심상한 무리들로서야 그 누가 마음에 기뻐할 리가 있겠습니까. 선인의 마음은 공정하기 때문에 우리 임금을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며 우리 백성을 모두 평안히 하고자 하지만, 심상한 무리들이야 다만 제 한몸을 보전하려 하고 임금이나 백성에는 뜻이 없는 까닭에, 서로 시비를 가리는 의논이 옛날부터 없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이러한 일이 없을 수 없으리라고 봅니다. 지난번에 사론(邪論)이 나오게 된 것은 여기에 근원하는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대간(大奸)이 아니면 전날 신임해 쓰던 사람을 모두 물리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 사이에는 복심을 삼을 자도 있고 보좌인으로 삼을 자도 있으며 또 외처에 쓸 자도 있는 것이니, 위에서 이러한 내용을 잘 아시고 반드시 어진이를 먼저 가까이 하시면 군자들이 기세가 당당하게 되고 잡담이나 하는 심상한 무리들은 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한 때의 치란과 흥망이 모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지난번에 일정한 기간 동안 서용하지 않는 일을 삼공(三公)이 계달(啓達)하였을 때 성상께서 답하신 말씀은 지극히 옳았습니다.

삼공이 그 미안(未安)한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나 인정이 무사 안일에 빠지기 때문에 그러한 인정으로 아뢰었던 것인데, 성상의 분부가 한번 내려지자 하늘과 같은 그 말씀으로 인해 사람들이 기대를 모두 끊고 마음으로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아랫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하였더라면 모든 원망이 그 곳으로 몰려 들었을 것입니다.

군자와 소인의 사이에 억양(抑揚)하는 도(道)를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니 군자의 도가 신장하게 되면 소인의 도는 소멸하게 마련입니다. 욱지(陸贄)가 아뢰기를 ‘폐하는 훌륭한 뜻을 갖고 계시면서도 잘 다스리지를 못하기 때문에 신은 한밤중에 고요히 생각할 때마다 남몰래 탄식하고 깊이 애석해 합니다. 예전에 폐하께서 자리만 있고 뜻이 없다거나 뜻은 있어도 자질이 없었다면 신은 벌써 세속에 따라 부침(浮沈)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처럼 급급해 하겠습니까.’ 하였으니, 육지 같은 현자로서도 이와 같이 말하였는데 그보다 못한 사람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위에서 주장하지 않으면 아랫사람들이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상께서 만약 학문에 부지런히 힘쓰시어 성현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신다면, 뜻있는 선비로서 그 누가 자기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몸 바치지 않겠습니까.” 하고, 신응시는 아뢰기를,

“일정한 기간 동안 서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에 대한 전교는 지극하십니다. 《대전(大典)》의 본래 의도는 필시 틈을 엿보아 빠져나가거나 병을 칭탁하는 것 때문에 이런 법을 두었을 것입니다. 만약 일일이 분변(分辨)하고자 하면 인정(人情)에 구애받을 듯하기 때문에 일체 법으로 제약했던 것입니다. 만약 지공 무사(至公無私)하게만 한다면 그래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전》의 본래 의도는 필시 이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이 말도 옳습니다. 그러나 이 법을 거듭 신칙해 밝히지 않았던 것이 아니며 병인년에 했고 또 전년에도 했습니다. 6년으로 한정하는 법은 당초 설립할 때 사람들이 모두 불편하게 여겼는데, 세종(世宗)의 마음이 허조(許稠)와 합치되어 이루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처음에는 즐겨 부임했다가 바로 버리고 돌아오는데 버리고 와도 벌칙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꺼리는 것이 없으니, 진정 병이 든 경우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법이 있어야만 될 것입니다. 이 법이 일단 설립되었으니 관직을 버리고 상경하고 싶은 사람도 꺼리고 두려워하여 중도에서 그만둘 것입니다. 기강이 서게 되면 구차한 일이 없게 되지만 먼저 한두 사람이라도 분변해주려 할 것 같으면 정사는 고식적인 데 빠지고 말 것입니다. 만약 수령이 참으로 병이 있어서 관직에 있을 수 없다면 감사(監司)가 당연히 공론으로 계문(啓聞)할 것인데 지금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청탁함으로써 반드시 그 계책을 성사시키고 마니 어찌 온당치 않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성종조(成宗朝)에 부마(駙馬) 홍상(洪常)의 숙부를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삼은 적이 있었는데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않자 논계하여 끝내는 죄를 주었습니다. 근자에 회령 부사(會寧府使) 김계(金啓)의 일을 헌부가 논계한 지 이미 오래인데도 위에서는 윤허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상께서는 ‘김계가 비록 갑작스럽게 승진하기는 했어도 합당하면 보낼 수 있는 것이다.’는 의견이시니 그 뜻도 타당합니다. 다만 대간이 공론으로 계달한 것은 성상께서도 마땅히 힘써 따르셔야 할 것입니다. 김계의 마음가짐으로서도 조정을 잘 되게 하려고 할 것이며, 또한 그 인물이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갑작스레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논했다가 대간이 끝내 소청을 얻어내지 못하고 만나면 김계의 마음에도 어찌 겸연쩍어하지 않겠습니까. 서서히 2∼3년 지난 뒤에 이 직임을 명하신다면 간언(諫言)을 듣는 도리에도 합당하고 아랫사람들을 대우하는 일에도 타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경우는 그렇지 않는 점이 있다. 김계를 불선(不善)한 사람으로 논하여 저지하는데도 보낸다면 과연 그러하겠지만, 이는 단지 너무 빨리 승진시켰다는 것으로만 논하여 저지하는 것이니, 이는 공론이 그의 인물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대로 간들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전교는 지당하십니다. 다만 공론이 이미 갑자기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논했으니 물정(物情)에 조금이라도 석연치 않은 것이 있다면 김계에게도 무슨 영광이 되겠습니까. 사대부는 마땅히 염치를 배양해 나가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의 백관 가운데에 갑자기 승진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김계가 비록 지난해에 비로소 당상(堂上)에 올랐지만 출신(出身)한 지가 이미 오래이니 이 직임을 맡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해조(該曹)와 상신(相臣)의 뜻도 그러했기 때문에 의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면 그래도 되겠지만 김계는 나이가 겨우 40여 세인데 가선(嘉善)으로 갑자기 승진되는 것은 김계 본인에게도 어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공론이 행해지지 않는데 구차하게 행공(行公)한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원전】 21 집 214 면

선수 02/07/01(임신):

이조 판서 박충원(朴忠元)이 면직되었다. 충원은 명종조에 벼슬하여 사세에 따라 부침(浮沈)하면서 육경(六卿)에까지 올랐는데, 그가 이판(吏判)이 되자 백인걸(白仁傑)이 그를 탄핵하려 하였으므로,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원전】 25 집 418 면

선조 02/07/18(기축):

이때 을사년 찬축(竄逐)된 이후에 당상(堂上)에 오른 사람은 9인으로 백인걸(白仁傑)·노수신(盧守愼)·황박(黃博)·김난상(金鸞祥)·유희춘(柳希春)·민기문(閔起文)·이담(李湛)·이진(李震)·이원록(李元祿)이었으며, 귀환의 은사를 받고 얼마 안 되어 일찍 죽은 자는 3인으로 한주(韓澍)·이염(李焰)·유감(柳堪)이었으며, 이때 아직 당상이 되지 않은 자는 윤강원(尹剛元) 1인뿐이었다.
【원전】 21 집 219 면

선조 02/08/07(무신):

백인걸(白仁傑)을 동지경연(同知經筵)에, 이중호(李仲虎)를 검상(檢喪)에 제수하였다.
【원전】 21 집 219 면

선수 02/09/01(신미):

이준경(李浚慶)이 주상을 모신 자리에서 을사년의 사건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위사(衛社) 당시에 선한 선비로서 죽음을 당한 자도 간혹 있습니다.”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대신의 말이 어찌 그리 모호하고 분명치 못합니까. 위사는 바로 위훈(僞勳)이고 그때 죄를 당한 자들은 모두가 선한 선비들이었습니다. 인종(仁宗)이 승하하자 중종(中宗)의 적자(嫡子)로서는 명종(明宗)만이 있을 뿐,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어찌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갔겠습니까. 간특한 무리들이 감히 하늘의 공을 탐내어 사림(士林)을 참벌(斬伐)하였는데, 이들이 위훈에 기록되었으므로 신인(神人)이 울분에 쌓인 지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신정(新政)의 시기를 맞아 위훈을 삭제하여 명분을 바로 세움으로써 국시(國是)를 정립하는 일을 늦추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였다. 준경이 아뢰기를,

“그 말이 그렇기는 하나, 다만 선왕조의 일이어서 갑자기 고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니, 이이가 이르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명종이 어린 나이로 비록 간흉(姦兇)들의 속임을 당하기는 하였으나, 지금 하늘에 계신 영령이 그들의 간악함을 꿰뚫어 보고 계실 것인데, 어찌하여 고칠 수 없겠습니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인걸(白仁傑)이 이준경을 볼 적마다 이이에 대해 어질고 재주가 있어 천용(薦用)할 만한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런데 이이가 주상 앞에서 두 번씩이나 자기 말을 꺾어버리자 준경은 불쾌하게 여기면서 인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말한 이이는 어쩌면 그리 말이 가벼운가?”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이이는 해직하고서 강릉(江陵)으로 돌아갔다.
【원전】 25 집 419 면

선수 03/03/01(무진):

좌의정 권철(權轍)이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상이 돈유(敦諭)하자 나와서 시사(視事)하였다.

백인걸(白仁傑)이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임금과 재상이 서로 부자 형제간처럼 화협해야 사공(事功)을 이룰 수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한 듯합니다.” 하였는데, 권철은 인걸이 자기와 상과의 사이가 불화하다고 배격하는 것으로 잘못 알아듣고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백군으로부터 그렇게 호된 공박을 받았으니 다시 나갈 수 없다.” 하였다.

당시 이준경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고 권철이 또 병을 핑계하였으므로 논의가 분분하여 시끄러웠다. 홍섬(洪暹)이 듣고 아뢰기를,

“인걸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권철과 이준경은 원래 혐의가 없습니다. 남의 말로 하여 대신들이 불안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걸은 성격이 원래 질박하고 솔직하여 고인(古人)의 풍모가 있는 사람이다. 그가 비록 지나친 말을 하였더라도 개의할 것은 없다.” 하고, 이어 시사하도록 권철을 돈유하였다. 인걸이 그 소식을 듣고 놀라 정원에 나아가 일기(日記)를 살펴보니 권철을 배척한 말이 별로 없었으므로, 이에 상소를 올려 해명하자 그제야 권철이 나와서 시사하였다.
【원전】 25 집 420 면

선수 03/04/01(무술):

병조 참판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 1. 폐정(弊政)을 계혁할 것, 2. 을사년과 기유년의 원왕(?枉)을 신설(伸雪)할 것, 3.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할 것, 4. 이황(李滉)을 초치할 것, 5. 본인은 치사(致仕)하고 시골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했는데, 상이 너그러이 답하고 이어 그 상소문을 대신에게 내려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준경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본 상소문 중 성상이 학문에 주력하실 것과 어진이를 초치하여 정사를 맡겨야 한다는 것은 오직 성상이 살피셔서 애써 행해야 할 일이고, 그 나머지 폐단에 관한 것은 모두 현재 상의하고 강구(講究)하는 일들로써 유사(有司)가 맡아 해야 할 일입니다. 그 대의는 을사년과 기유년의 원왕을 신설하고 선현(先賢)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하려는 것인데, 을사년 사건은 사실 의심스러운 점이 너무 많아 지금으로서는 감히 다시 의논할 수 없는 일 같고, 기유년의 옥사는 매우 억울합니다. 그리고 종사 문제는 그가 칭한 것은 비록 조광조 뿐이었으나 우리 동방의 이학(理學)으로 말하면 실로 김굉필이 길을 열었으니, 두 분 다 문묘에 종사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전일 성상의 하교에 을사인(乙巳人)들의 일은 오늘날 논의할 문제가 아니고, 종사 문제는 가벼이 거행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으므로 신들은 감히 입을 놀리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인걸은 노신(老臣)으로서 시폐(時弊)를 진술한 것이 모두 절실하고 긴요한 문제들이었는데, 끝내 한 가지도 시행되지 않자 논자들이 애석해 하였다.
【원전】 25 집 420 면

선수 03/04/01(무술):

영의정 이준경 등이 정미년과 기유년 죄인들의 억울함을 씻어주고 이기(李?)·정언각(鄭彦慤) 등의 관작을 삭탈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 재해가 절박하고 인심이 안정을 잃고 어수선한데도 삼공이 별로 건백(建白)한 일이 없어 사론이 비난하자 이준경은 스스로 불안을 느끼면서 신진(新進)들과 더욱 멀어졌고, 기대승(奇大升)은 이미 물러났으므로 사류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백인걸이 말하기를,

“지금 조정에는 신구(新舊)가 불화하여 대신들은 안정만 찾으려다가 눈앞의 안일만 노리는 폐단이 나타나고 있고, 신진들은 무작정 건백만 하여 너무 격한 폐단이 일고 있으니, 이를 마땅히 조화시켜 중도를 얻도록 해야 한다. 내가 주상을 뵙고 다 말해야겠다.” 하니, 이를 들은 이는 인걸이 혹시 말을 많이 하다가 본의와는 어긋나 도리어 주상으로 하여금 붕당(朋黨)이 있는가 의심하게 할까봐 굳이 말렸다. 홍섬이 인걸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승을 하고 있는 것이 어떤가? 만약 정승을 할 만한 자가 조정에 있다면 그대가 나를 탄핵하라.” 하였는데, 인걸이 그 자리에서는 대답을 못하고 물러와 남에게 말하기를,

“퇴계(退溪)가 올라온다면 홍섬을 정승에서 체직하도록 논하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다만 퇴계가 오지 않아 그렇다.” 하였다.

인걸이 을사년의 원왕을 신설해야 한다고 발론하자, 사람들이 울분을 터뜨리며 그 억울함을 신설하지 않아서 이와 같이 가뭄이 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준경은 물의(物議)를 억제하기 어렵게 된 것을 보고 동료들을 거느리고 발론하였는데, 다만 정미년 벽서(壁書) 사건의 옥(獄)과 기유년 충주옥(忠州獄)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서만 신설할 것을 청하고, 을사년 옥사에 관하여는 거론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삼사(三司)가 발론하여 을사년 이후 모든 원왕에 대하여 신설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때도 위훈(僞勳)에 대하여는 거론하지 않았다.
【원전】 25 집 420 면

선수 03/04/01(무술):

박점(朴漸)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는데 병을 이유로 사직하니 면직하였다.

박점은 집안에서 효우(孝友)로 소문이 났다. 심의겸(沈義謙)과 같이 사귀었는데, 이양(李樑)이 용사할 때 박점은 사림이 장차 화를 당하리라 생각하고 의겸으로 하여금 비밀히 아버지 심강(沈鋼)에게 아뢰어 이양을 쫓아버리도록 힘껏 권하였다. 그리하여 이양이 쫓겨나자 박점은 공을 숨기지 못하고 떠벌여 명예가 높아졌고, 명사들과 사귀게 되어 문정(門庭)이 조용한 날이 없었다. 박점은 재지가 부족하고 학술도 없었으면서 나라 걱정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였고, 선사(善士)로서 통현(通顯)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를 반드시 당로자에게 천거하려고 하여 식자들은 그의 어리석음을 민망히 여겼으나, 벼슬길에 나가기를 바라는 자들은 혹 그에게 붙어 그를 자기 명예로 삼기도 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훼예(毁譽)가 엇갈렸다.

급기야 효행으로 천거되어 성혼(成渾) 등과 함께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가서 등제(登第)하였는데, 백인걸이 평소에 면식이 없이 그 이름만 듣고 있다가 성혼이 6품으로 발탁되자 인걸이 상께 아뢰기를,

“박점도 학행을 모두 갖추었으니 6품으로 발탁 등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물정이 좋게 여기지 않았고 꺼리는 자가 더욱 많았으며, 혹자는 인걸이 잘못 추천하였다고 탓하기도 하여 인걸은 그 일을 후회하게 되었다. 이준경도 그 말을 듣고는 불평 중이었는데, 하루는 족인(族人)이 찾아와 관절(關節)이 통하게 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준경이 들어 주지 않자 그 사람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박점은 백의(白衣)이면서도 권세가 있어 그의 편지 한 장이면 주군(州郡)을 진동시킬 수 있는데, 무슨 정승이 도리어 그렇게 형편없는가.” 하였으므로 그 말을 들은 준경은, 그가 그렇게도 행검(行檢)이 없으면서 중명(重名)을 도둑질하고 있는가 하고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그가 정언에 임명되자 준경은 대사간 김난상(金鸞祥)을 보고 박점이 청요직(淸要職)에 맞지 않는 점을 말하게 되었고, 난상 역시 이미 박점의 잘못에 대하여 들은 터라 발론하여 그를 탄핵하려 하였다. 동료가 놀라 그를 막자 난상이 말하기를,

“내가 장관(長官)으로서 남에게 신임받지 못하고 있으니 자핵(自劾)해야겠다.” 하고는, 예궐하여 아뢰기를,

“박점은 의논(議論)을 좋아하여 유생 시절부터 정사(政事)를 헐뜯어 논평하였고 조사(朝士)와 교결했으므로 청요직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동료들과 탄핵하여 체직시키려 하였는데, 동료가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는 신이 무상하여 동료들에게 신임받지 못했기 때문이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간이 난상을 잘못이라 하여 논핵하여 체직시키자, 박점은 드디어 병을 이유로 배사하지 않았다.

준경이 경연에 입시하여 박점의 죄과(罪過)를 극구 말하자 상이 이르기를,

“점이 그렇게 무상하다니 내가 하마터면 속을 뻔하였다.” 하고서, 인걸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무슨 까닭으로 박점을 천거하였는가?” 하니, 인걸이 사죄하며 아뢰기를,

“신이 잘못 듣고 망발을 하였습니다. 준경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원전】 25 집 421 면

선조 03/04/27(갑자):

병조 참판 백인걸(白仁傑)이 상소를 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는 폐습을 통렬히 개혁하고 대신으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큰 지혜를 지닌 선비를 찾아내어 서로 정치에 필요한 것을 강구하여 잘못된 정사를 모두 고치게 하소서. 그리하여 진상하는 공물(貢物)은 헤아려 감하고 제색(諸色)의 졸례(卒隸)들의 고통을 고르게 하며 일족(一族)과 겨린[切隣]에 지우는 폐단을 없애고 여러 고을의 명목 없는 세금을 금하며 기타 실시할 만한 방책 중 진실로 국가에 편리하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도 방법을 강구하여 시행하기를 기필한다면 지금 그래도 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전하의 교서(敎書)에 ‘옛날에 우공(牛公)이 통곡하니 3년 동안 가물이었는데, 지금은 몇 명의 우공이 통곡했는지 모르겠다.’ 하고, 인하여 지체된 죄수를 풀어주라고 명하시어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언표(言表)에 넘쳐 흐르니 우러러 보고 듣는 사람들 그 누가 고맙게 받들지 않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억울함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정사에는 완급이 있는데, 작은 것을 먼저하고 큰 것을 나중에 하며 느슨한 것을 힘쓰고 급한 것을 소홀히 한다면, 이는 이른바 3년상은 하지 못하면서 시마(?麻)나 소공을 살핀다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의 억울한 일 중에 을사년이나 기유년의 죄적(罪籍)보다 큰 것이 어디 있겠으며, 오늘의 정사로서 억울함을 씻어주어 뭇 사람들의 마음을 위안하여 기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잘 미루어 허물 용서하는 유음(兪音)을 펴서 을사년과 기유년에 적몰(籍沒)한 물건을 모두 돌려주도록 하고 사림(士林)으로서 이름이 죄적에 있는 자는 모두 직첩(職牒)을 돌려주소서. 이와 같이 하신다면 충의(忠義)로운 영령(英靈)이 지하에서 감동하여 울 것이고 사류(士類)들은 밝게 다스려진 세상에 흥기하여 국시(國是)가 바른 데로 귀결되고 뭇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이 상소를 삼공(三公)에게 보이고 시행할 만한 것은 의논하여 행하도록 하라. 다만 을사년과 기묘년 등의 일은 지금 의논해야 할 일이 아니다. 묘정(廟庭)에 종사하는 것도 중대한 일이니 경솔하게 거론함은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원전】 21 집 223 면

선조 03/05/09(병자):

삼공이 의논드리기를,

“삼가 백인걸(白仁傑)의 상소를 살피건대, 성학(聖學)의 공력(功力)을 이루는 일과 어진 이를 불러 위임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성상(聖上)께서 마음에 어떻게 성찰(省察)하여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감히 그 사이에 의논을 제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폐습에 대해서는 모두 지금 헤아려 확정 강구해야 하는데 이는 곧 유사(有司)들이 해야 할 일이므로 감히 성청(聖聽)을 번거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의(大義)를 보면, 을사년과 기묘년의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깨끗이 씻어주고 선현(先賢)들을 문묘에 배향하려는 데 있을 뿐입니다. 을사년의 일은 실제 의논할 만한 단서가 있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을 듯합니다. 기유년의 옥사(獄事)에 이르러 제일 원통하고 억울한 것은 당시 범인들이 시골의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면 곧 연소한 어린 아이의 무리들이었으니, 공을 노려 일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무고당한 데다가 권간(權奸)들의 화를 즐겨 혹독하게 형벌하는 독(毒)을 입어 잠깐의 고통을 늦추려는 마음에서 서로 끌어들이고 없는 죄를 있다고 자백하여 마침내 대역죄(大逆罪)에 빠졌던 것입니다. 말하기에 도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다행히 훌륭한 임금을 만났으므로 지하에 있는 원혼이 설원(雪?)해 주기 바라는 것이 처음 죽던 날보다도 심하였으니 천변(天變)을 초래한 것도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또 종사(從祀)하는 일로 말하면, 백인걸의 의견은 조광조를 지적하여 말하였지만 도학(道學)의 공으로 볼 적에는 조광조를 종사하게 하려면 김굉필을 아울러 종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동방이 신라(新羅)로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문장 있는 선비들이 찬란하게 배출되었지만 의리(義理)의 학문은 실로 김굉필로부터 열렸던 것입니다. 김굉필이 아조(我朝) 초기의 학문이 끊어진 뒤에 태어나 처음으로 성현의 학문을 흠모하여 구습(舊習)을 모두 버리고 《소학(小學)》에 진심하여 명성과 이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학문에 힘쓴 지 10년 만에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모두 예법(禮法)을 따랐고 지경(持敬) 공부에 전력한 지 30여 년에 정력(精力)이 쌓이고 도(道)와 덕(德)이 이루어져 말과 행동이 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난세를 만나게 되자 화(禍)를 피하지 않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으니, 세상에 시행한 것은 없었으나 그가 마음으로 체득한 것이 있음을 여기에서 더욱 증험할 수 있습니다. 가르쳐 인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우리 동방의 선비들로 하여금 성현의 학문이 있음을 알게 한 것은 실로 이 사람의 공입니다.

조광조 또한 일찍이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독실히 실천하여 지식이 뛰어났으니 실로 동방의 불세출의 인물입니다. 김굉필이 화를 당한 뒤로 꺾이고 상패된 나머지 사기(士氣)가 땅에 떨어지고 학문이 침체되어 나아갈 방향을 모르고 있을 때 조광조가 이에 다시 《소학(小學)》의 도를 밝히고 학문의 공덕을 지시(指示)하여 세도를 부식(扶植)시켰으니, 지금 유학(儒學)하는 선비들이 대략 방향을 알고 취생 몽사(醉生夢死)의 지경에서 벗어나게된 것은, 실로 조광조가 학문의 맥락을 다시 진작시킨 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비추어 보면 두 사람을 문묘에 배향하는 일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원전】 21 집 224 면

선수 03/08/01(병신):

이때는 상이 대통을 이은 지 오래지 않아 자전을 효성스레 받들고 있었고, 윤원형의 당류들로 원망을 품고 숨어 있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준경 등이 기묘년에 삭훈(削勳)을 서둘다가 화를 불렀던 전철을 징계 삼아 망설이며 발론을 못하였고, 윤임 사건의 순역(順逆)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다가 삼사가 발론한 후에야 비로소 정청(庭請)하였다. 그래서 상은 그것이 본심이 아닌가 의심하여 즉시 윤허하지 않았던 것이다.

판서 송기수(宋麒壽)가 입시하여 을사인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정상을 극언하면서 눈물을 흘리자, 상이 이르기를,

“경은 그때 조정에 없었던가?” 하니, 기수가 조정에 있었다고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경은 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가?” 하니, 기수가 대답을 못하였다. 좌우에서 아뢰기를,

“죽고 사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몸을 버리고 할 말을 다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백인걸(白仁傑)은 어찌하여 지금까지 끄떡없이 살아 있는 것인가?” 하자, 좌우 역시 대답을 못하였다.
【원전】 25 집 425 면

선수 03/11/01(을축):

상이 공론에 대하여 굳게 반대하고 있을 때, 혹자가 심의겸(沈義謙)에게 자전께 은밀히 아뢰어 성사가 되도록 할 것을 권하였는데, 의겸은 감히 못할 일이라고 사양하였다. 이에 백인걸이,

“이양(李樑)이 귀양가게 된 것이 사실 의겸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인데, 지금 감히 못하겠다고 하니 이는 삭훈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의겸을 허물하였다. 의겸이 남에게 말하기를,

“서리(胥吏)·액정(掖庭) 할 것 없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참여된 자가 1천여 명에 달하는데 서로 결탁하고 있으므로 필사적으로 공론을 저지할 것이다. 만약 거론했다가 이루지 못하면 도리어 해가 있을 것이니 그만두느니만 못하다.” 하였는데, 그후 듣자니 액정인들이, 공론이 선왕(先王)을 저버리고 있다고 자전에게 읍소(泣訴)하여 자전이 동요되었으므로, 상이 독단하기 어려워 해 끝내 공론을 따르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원전】 25 집 426 면

선조 04/06/21(신해)

백인걸(白仁傑)을 대사헌에 제수하였다.
【원전】 21 집 236 면

선조 04/07/01(신유):

대사헌 백인걸을 체직시키고 강사상(姜士尙)으로 제수하였다,
【원전】 21 집 236 면

선수 04/07/01(신유):

백인걸(白仁傑)이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坡州)로 돌아갔다. 이 당시 사류가 청요직을 차지하고 있긴 하였으나 대신들은 모두 세속을 따라 목전의 안일만 구하여 사류와 서로 논의가 맞지 않았는데, 구신(舊臣)으로서 뜻을 얻지 못한 자들은 틈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겸(吳謙)과 박충원(朴忠元)이 논박을 받자 용렬한 대관(大官)들은 모두 불평을 품고 있었다. 백인걸은 평소에 이준경(李逡慶)의 사람됨을 존경하면서 항상 사류가 대신에게 부합되지 않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이따금 말하기도 하였다. 또 기대승(奇大升)과 심의겸(沈義謙)을 인정하지 않고 항상 남에게 그 과실을 들추었으므로 사류가 심히 의심하였다.

이원경(李元慶)은 준경의 재종제(再從弟)로서 실직되어 불만을 품고 조정에 일이 벌어지기를 깊이 바라고 있었다. 주상의 외삼촌 정창세(鄭昌世)는 덕흥군(德興君) 부인의 아우로서 은택을 입고 벼슬을 얻어 내승(內乘)이 되었는데, 그 또한 권세를 잡고자 서로 비밀히 모의하여 박순(朴淳)·이후백(李後白)·오건(吳健) 등 10여 인을 공격하려 하였다. 원경은 인걸과 준경을 후원 세력으로 삼아 늘 인걸을 찾아가 박순 등의 과실을 비방하였는데, 인걸은 노쇠하여 그 자세히 살피지 않은 채 범범하게 듣고 예사로 답하면서 옳다 그르다 하는 일이 없었다. 원경은 늘 준경의 말을 가탁하여 인걸을 움직였는데, 어느날 준경의 뜻으로 인걸에게 말하기를,

“상께서 이후백과 박순을 매우 싫어하시니 제거하기가 쉽습니다.” 하니, 인걸은 그렇겠다고 여기고 민기문(閔起文)에게 말하였다. 기문이 노수신(盧守愼)을 찾아가 볼 때 원경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기문이 말하기를,

“백사위(白士偉)가 허튼 일을 하려고 하니 공이 중지시키십시오.” 하니, 원경이 말하기를,

“백옹(白翁)이 사생을 돌아보지 않고 거사하려 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중지하겠습니까.” 하였다. 기문이 일어나 간 뒤에 원경이 수신에게 말하기를,

“숙도(叔度)는【민기문의 자.】 믿을 만한 자가 못됩니다. 오늘 나와 함께 백공의 말을 듣고서도 공에게 중지시키라고 말하니, 이런 사람이 어찌 믿을 자이겠습니까.” 하였다. 얼마 후 인걸이 수신에게 말하기를,

“사림 중에 나이 어리고 기가 높은 자를 내가 억제하려고 합니다.” 하니, 수신이 중지시켰다. 이준(李濬)이란 자가 원경이 정창세에게 보낸 편지를 입수하여 심의겸의 형 인겸(仁謙)에게 보였는데, 그 대략에,

“앞서 영추(領樞)를 보고 다음에 사위(士偉)를 보았는데 이 일이 오늘 내일 사이에 터질 것이니, 서로 내통하여 빨리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의 논의가 떠들썩해져 모두 인걸이 장차 사림을 해칠 것인데, 그 일을 준경이 주도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탁(李鐸)이 그 소문을 듣고 크게 미심쩍어 그의 족친 박수(朴受)에게 그 까닭을 묻고 또 중지시키게 하였는데, 인걸이 놀라 말하기를,

“내가 어찌 사림을 해치겠소. 다만 방숙(方叔)을 온당치 않게 여길 뿐이오.” 하였다. 박수가 말하기를,

“남곤(南袞) 무리의 신무문(神武門) 일을 공이 어찌 답습하려 하십니까.” 하자, 인걸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사림이 나를 그렇게까지 의심합니까?” 하였다. 권철(權轍)도 사람을 보내 인걸을 중지시켰는데, 인걸이 권철과 박순을 차례로 찾아가 스스로 해명하였다. 그러나 사대부들이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인걸이 이로 인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돌아갔다.

이 당시 백인걸·노수신·김난상(金鸞祥)·민기문이 을사 사화 때 살아남은 선비들로서 명망과 실제가 다 높아 청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높은 지위를 으시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후학을 멸시하여 그 과격함을 혐오하는 점은 이준경과 뜻이 맞았다. 이 때문에 실직한 잡다한 무리들로서 이들에게 명함을 들이밀고 선동하며 문제를 야기하여 기회를 타서 이익을 도모하려고 하는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사림이 모두 장차 큰 사화가 닥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줄을 이어 벼슬을 그만두었다. 백인걸 등도 조정에 편히 있지 못하였으나, 오직 노수신만은 그 뜻이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았고 주상의 은총이 날로 융숭하였기 때문에 예나 다름없이 그대로 벼슬하였다.
【원전】 25 집 428 면

선수 04/07/01(신유):

상이 특별히 명하여 박순을 우찬성으로 삼았다. 박순은 계축년 정시(庭試)에 장원하였다. 명종이 친히 한 경서를 시험하였는데, 박순의 풍도와 자태가 명쾌 활달하고 행동 거지가 고상하였으며, 글 뜻을 분석한 것이나 응대하는 말이 자상하고 명민했으므로 명종이 기특하게 여겨 장원으로 뽑았다. 이 때문에 이름이 조정에 자자하였고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 당시 윤원형(尹元衡)의 권세가 치성했기 때문에 사대부로서 청명(淸名)이 있는 자들이 모두 스스로 절조를 지키기만 하고 감히 거역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순은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홀로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논의를 주관하여‘공소(恭昭)’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허물이 있더라도 능히 고친 것을 공(恭)이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그를 폄하한 것이었다. 원형이 크게 노하여 조정에 창언(倡言)하기를,

“나라의 원훈(元勳)의 시호에 충(忠)자가 없으니 그 의도가 불순하다.” 하고, 마침내 국문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는데, 안현(安玹)이 극력 구제해 준 덕분에 모면하고 체직되어 귀가하였다.

계해년 이후 사류가 다시 진출하여 등용될 때 박순이 대사간으로 발탁되었는데, 강개하여 말하기를,

“양기(梁冀)를 탄핵하고 두헌(竇憲)을 참수하여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일이 나의 책임이다.” 하였다. 마침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원형을 탄핵하기로 꾀하고, 한 달 이상 쟁론하여 원형을 먼저 방출한 다음 계속 심통원(沈通源)을 논핵하여 재상직을 면직시키니, 백성들이 길 가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며 이로부터 어지러운 정사가 일신되었다.

박순은 구신(舊臣)으로 세속에 물들지 않고 홀로 풍도를 견지하였으며, 권간(權奸)을 방출하여 사림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크게 등용되어서도 겸손하게 선비를 대하여 선비들도 기쁜 마음으로 친근히 한 데다 주상께서 특별히 은총을 베풀었으므로, 사림이 그를 힘입어 다시 평안해졌다. 이후백(李後白)은 법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으나 도량이 크지 못했다. 오건(吳健)은 이조 낭관(吏曹郞官)이 되자 사로(仕路)를 깨끗이 하여 쌓인 폐단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흑백을 철저히 가려 원망과 비방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소배들이 더욱 꺼리고 미워하였다. 백인걸이 물러난 뒤에 대각(臺閣)이 이원경(李元慶)을 미워하여 죄를 주고는 싶었으나 조정에 풍파가 일어날까 염려하여 모두들 ‘대신이 경연 석상에서 그 사유를 자세히 진달하고 쫓아내면 일이 매우 타당할 것이다.’고 하므로, 좌의정 권철(權轍)이 그 방침에 따라 논계하려고 하다가 이준경에게 연루될까 우려하여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후 어떤 자가 시를 지어 종루(鍾樓)에 방을 걸어 조정의 훌륭한 신하들인 노수신·허엽(許曄)·이후백·오건 등 10여 인을 비방하였는데, 글과 글씨가 정밀하고 노련하여 보통 서인(庶人)의 솜씨가 아니었으므로 사대부가 더욱 불안해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라에 변란이 없고 조정에 권행(權倖)이 없으며 성상이 공정한 마음으로 정사에 임하였기 때문에, 사림의 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원전】 25 집 428 면

선조 05/09/19(임인):

무진년 여름에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여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소에 김굉필을 논하기를,

“학문이 끊어진 뒤에 태어나서 일찍이 큰 뜻을 품고 분발하여 ‘성현도 배우면 될 수 있다.’ 하고 《소학(小學)》을 익혀서 근본을 배양하고 《대학(大學)》의 가르침에 따라 규모를 세웠으며, 성(誠)과 경(敬)을 힘써 지키고 예법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조예가 깊어지고 실천이 더욱 돈독해짐에 이르러서는 사문(斯文)을 천명(闡明)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사람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고 순서있게 가르치니 세상에 이름 있는 현인 길사(賢人吉士)가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가르침이 미치는 곳이면 누구나 선(善)을 향하여 흥기(興起)되었으므로 한 시대가 도학의 종주(宗主)라고 일컬었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세 번째 올라오자 당시 병조 참판 백인걸(白仁傑)이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 상소를 대신에게 내렸다. 이준경 등이 의논드리기를,

“도학의 공으로 말하자면, 조광조를 종사(從祀)하려면 김굉필도 종사하여야 합니다. 신라로부터 고려까지 문장에 능한 선비는 빈번하게 많이 나왔으나 의리의 학문은 실로 김굉필로부터 계도(啓導)되었습니다. 김굉필은 우리 나라의 학통(學統)이 끊어진 뒤에 태어나 제일 먼저 성현의 학문을 흠모하여 구습(舊習)은 모두 버리고 《소학》에 전심하여 명예와 이욕을 구하지 않고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반드시 예법에 따르며, 치경(致敬)에 전력하여 오래도록 힘을 쌓아 도덕(道德)을 이루었는데 불행히 난세를 당하여 화를 당할 때 조용히 죽음에 임하였으니, 비록 세상에는 포부를 펴지 못하였지만 그 마음속에 자득(自得)함이 있음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생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우리 나라의 선비들로 하여금 성현의 학문이 있음을 알게 한 것은 실로 이 사람의 공입니다.” 하였다. 금년 봄에도 부제학 유희춘이 경연에서 헌의(獻議)하기를,

“김굉필과 정여창에게 좋은 시호를 내려 선유(先儒)를 숭장(崇奬)하는 성조(聖朝)의 뜻을 보이소서.” 하니, 좋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1 집 243 면

선조 07/03/10(을유):

경연관 정지연(鄭芝衍)이 노쇠하여 은퇴한 신하들을 문안하기를 계청하니, 이조로 하여금 서계하도록 명했다. 곧 오겸(吳謙)·정대년(鄭大年)·송순(宋純)·백인걸(白仁傑)이다.
【원전】 21 집 297 면

선조 07/03/11(병술):

상이 오겸·송순·백인걸에게 음식물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원전】 21 집 297 면

선조 08/10/16(경진):

상이 호조(戶曹)에 전교하였다.

“전 대사헌 백인걸(白仁傑)이 파주 땅으로 물러갔으니, 고을에서 그의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하라.”
【원전】 21 집 333 면

선수 09/07/01(임진):

의주 목사 곽월(郭越)이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상소 가운데 이준경의 잘못을 논하고, 또 백인걸(白仁傑)이 사림에게 재앙을 전가시키려 하였으나, 비밀스런 계획을 숨길 수 없게 되어 부끄러워 스스로 물러갔다고 논하였다. 상이 노하여 삼공을 불러 전교하기를,

“이준경은 주석(柱石)과 같은 원로이거늘 곽월이 감히 추급하여 헐뜯었고, 백인걸은 순수한 충성이 태양을 꿰뚫거늘 곽월이 궁중과 교통하여 사림에게 재앙을 전가하였다고 지목하니,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다. 잡아다가 끝까지 신문하려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홍섬·노수신 등이 아뢰기를,

“이 말은 곧 여염의 근거없는 말인데 곽월이 길에서 들은 것을 가볍게 믿고는 이내 감히 여쭈었으니 참으로 엉성합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너그럽게 용납하여 언로(言路)를 넓혀야 합니다.” 하자, 상이 그만두었다.
【원전】 25 집 467 면

선조 09/07/11(임인):

삼공을 불러 전교하기를,

“의주 목사 곽월(郭越)의 상소(上疏)에 대한 경들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삼공이 아뢰기를,

“신들이 곽월이 진달한 상소를 보니 그 내용이 소탈(疎脫)된 점은 있으나 그 마음은 모두 충애(忠愛)에서 나온 것으로 간언을 따르리라는 것을 주로 하고 있으니, 머물러 두고 살펴보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다만 문소전(文昭殿)에 대한 일은 사체가 중대하여 경솔히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가 이 상소를 보건대, 문소전에 대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이준경(李浚慶)과 백인걸(白仁傑)을 논한 것은 패려하고 망령스럽기 그지없다. 이준경은 국가의 주석(柱石)인 원로(元老)인데 곽월이 감히 심하게 비난하였고, 백인걸은 과인이 즉위한 처음 그 정충(精忠)이 태양과 같았는데 도리어 사림(士林)의 화(禍)를 획책하다가 부끄러워 스스로 물러간 것이라고 하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곽월의 심술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반드시 실정이 있을 것이다. 백인걸이 화를 획책하였다는 일에 대해 곽월을 끝까지 추문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감히 항간에 떠도는 말을 임금에게 아뢰었으니 그의 무식함이 또한 심하다.” 하였다. 삼공이 다시 아뢰기를,

“신들도 그 상소를 보았습니다. 이준경을 논한 내용은 칭찬하기도 하고 폄척하기도 했으니 깊이 탓한 것은 아니었고, 이른바 백인걸이 화를 획책하였다고 한 일에 대해서는 당시 항간에 근거없는 말이 많이 나돌았었는데 곽월이 이를 믿고 상께 아뢰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들이 소탈(疏脫)되었다고 아뢴 이유입니다. 끝까지 추문하라는 분부는 매우 미안하니, 전하께서는 너그러이 용납하시어 언로를 넓히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런 사람은 끝까지 추문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아뢴 내용은 곽월을 비호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따르기로 하겠다. 옛부터 나랏일의 잘못은 곧 대신들의 책임인 것이다. 이제 경들 3인은 일심 동력으로 과인의 미비한 점을 보필하여 국가에 충성을 다할 것으로 마음을 삼으라. 따라서 논의할 때에도 아첨하는 소유(小儒)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원전】 21 집 339 면

선조 11/02/29(경술):

경기 감사의 서장에,

“파주(坡州)에 사는 동지(同知) 백인걸(白仁傑)이 빈궁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으니 식물(食物)을 헤아려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 생각에도 백인걸에게 식물을 하사하라고 명하려던 참이었다. 경의 장계가 내 뜻에 맞는다. 식물을 제급(題給)하여 내 뜻을 보이라.” 하였다.
【원전】 21 집 351 면

선조 11/04/15(병신):

파주(坡州)이 사는 동지(同知) 백인걸이 상소를 올려 내려준 식물(植物)에 대하여 사례하고 또 조광조(趙光祖)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우연히 하찮은 물건을 내린 것이니 경은 사례하지 말라. 문묘에 배향(配享)하는 일은 관계되는 바가 중하기 때문에 지금 경솔히 의논하기가 어렵다. 경은 그리 알고 있으라.”
【원전】 21 집 352 면

선수 11/08/01(경진):

백인걸(白仁傑)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인걸이 전가(田家)에 물러가 살면서 정성을 다하여 나라 일을 걱정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탄식하곤 하였다. 집에는 한 섬 곡식의 식량도 없어서 관조(官?)를 얻어다가 조석을 이어가는 형편이었다. 감사 윤근수(尹根壽)가 그의 가난한 형편을 아뢰자 특명으로 쌀과 콩을 두 차례나 내려 주었는데 인걸은 그것을 바로 향당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임금이 하사하신 것이니 당연히 함께 먹어야 한다.” 하고, 글을 올려 사은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서 문묘에 종사하는 현인 중에 오직 정몽주만이 선비의 명망에 어긋나지 않을 뿐, 그 나머지 설총(薛聰)과 안유(安裕)는 모두 조광조(趙光祖)보다 못한데도 오히려 성대한 예를 받고 있습니다. 조광조는 높은 학문과 큰 공로가 있는데도 홀로 보답하는 향사(享祀)가 없으니 신은 이 점을 실로 마음 아파하고 있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대신들에게 상의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종사의 예전(禮典)에 들게 하시면 사류(士類)들의 관첨(觀瞻)이 되어 사문(斯文)이 크게 변화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이때에 양주(楊州)에 도봉 서원(道峰書院)을 짓고 조광조에게 제향을 올렸다. 인걸이 스스로 대궐에 나아가 조광조의 문묘 종사와 도봉 서원의 사액(賜額)을 주청하고자 하여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입조(入朝)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대신들은 돌아간지를 모르고 상에게 봉조하를 제수하도록 아뢰었다.【바로 중국 조정에서 시행하는 봉조청(奉朝請)의 이름이다.】 상이 특명으로 자헌 대부에 승진시켜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하고 글을 내려 부르니, 인걸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이 늙고 쇠퇴한 데다가 얼마 남지 않은 나이로 다시 국문(國門)에 들어간 것은 조광조의 문묘 종사를 신청하고 도봉 서원의 사액을 받기 위해서였는데 아직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민망한 마음에 아무 말 없이 돌아왔는데 어찌 보고 들음으로 인연하여 마침내 높은 자리를 받게 될지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의 망령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구경(九卿)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니 신은 참으로 감히 만년의 여생으로써 스스로 기롱의 조소를 취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재차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곧 입조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손수 비답을 써서 칭찬하는 말로 타이르고 허락하지 않으니, 드디어 입시하였다. 상이 용모를 고치며 간절하게 물었으나 인걸이 귀가 어둡고 말이 둔하여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였다. 그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직분을 이바지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녹봉을 받지 않았는데, 상이 그 말을 듣고 유사에게 명하여 녹봉의 쌀을 실어다 주게 하였다.
【원전】 25 집 478 면

선수 12/05/01(을사):

지중추부사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진달하였는데, 첫 머리에 ‘녹미(祿米)를 주시니 특별하신 성은에 늙은 신하의 마음이 감격에 차서 차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리고 우선 조종조 이래 크게 변을 불러들인 것을 진달하고, 이어 당금의 재변을 불러들인 이유를 언급하였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전하의 재기(才氣)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영명(英明)하신데도 정치의 공효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신은 전하께서 병통이 있게 된 근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전에 경연에 입시했을 적에 늙고 어두워서 성상의 물으심에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물러나와 같이 입시했던 사람의 말을 듣건대 성상께서 지금의 조정 형편은 어떠하냐고 물으셨다 하니, 이것은 바로 신이 말씀드리고자 하던 것입니다. 신이 초야에 있으면서 들으니, 진신들 사이에 심의겸과 김효원이 당을 가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대신과 근신들이 진정시킬 계책을 의논하여 경연에서 아뢰어 두 사람을 모두 외직으로 보임시켰습니다. 그러나 조정은 조용해지지 않고 떠도는 의논이 구름처럼 일어나서 조금이라도 의겸의 무리에 가까운 자면 서인(西人)이라 지목하고 조금이라도 효원의 무리에 가까운 자면 동인(東人)이라 지목하여 조사(朝士)들이 모두 지목하는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을 논박하면 여러 사람들이 반드시 ‘아무개는 바로 아무의 당이기 때문에 논박을 당한 것이다.’라 하며 떠들어대고 한 사람을 천거하여 등용하면 여러 사람들이 반드시 아무개는 바로 ‘아무의 당이기 때문에 천거를 받은 것이다.’라 하며 떠들어대어 사정(私情)으로 지목하지 않는 것이 없는 실정이어서 대간과 전조(銓曹)도 손발을 쓸 수가 없습니다. 사류들도 비록 강개하여 논핵하고자 하지만 위에서는 서로 공격하는가 의심하고 아래서는 자기를 배척하는 것으로 의심할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동(東)·서(西)라는 두 글자는 바로 나라를 망치게 될 화근입니다. 선비로서 우뚝이 드러난 자는 세상에서 많이 볼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를 등용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오늘날 쓸 만한선비들은 모두 동서로 지목하는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동인이란 대부분 젊은 신진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나랏일을 도모하는 데에 용감스러우며 옳은 일을 하는 데에 진취적이니, 마땅히 이들을 부지하여 성취시켜 주어야지 배척하거나 억제하여 그들의 뜻을 저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서인이란 대부분 선배인 구신들을 가리키는데【여기서 이른바 구신이란 상이 즉위하던 초기에는 신진이었던 자들이다. 이들이 나이는 많으나 새로운 정치에 등용되어 악을 내치고 선을 발양하며 새로운 일을 건립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으니, 윤원형(尹元衡)과 이양(李樑)의 시대에 부침하던 용렬한 구신들과는 스스로 분별이 되었다.】 변고를 거치며 힘써 권간(權奸)을 제거하여 공이 사림에 있으니, 이들 역시 사랑으로 대우하고 새롭게 연마시켜야지 소원하게 대하고 배척해서 그들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동인으로서 서인을 공격해서도 안 되고 서인으로서 동인을 공격해서도 안 됩니다. 동인과 서인을 모두 배척하고자 한다면 이는 전하의 조정을 텅 비게 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동과 서를 조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함께 공경하고 협력하게 하는 것이 군자의 논의일 것입니다.” 하고, 또 다시 아뢰기를,

“조광조의 공덕은 마땅히 문묘에 종사(從祀)되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변방의 방비를 신칙하여 군정을 잘 수행하고 기계를 수선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리고 서북 지방의 산융(山戎)과 남쪽 변방의 해적에 관한 일을 논하였는데 상소한 내용이 수천 글자나 되었다. 상은 후한 비답을 내리고 정원으로 하여금 한 벌을 등서하여 대내로 들여와 어람에 대비하게 하였다.

당초 백인걸이 입대했을 적에 자기의 소회를 다 아뢰지 못하자 소장을 올려 모두 진달하려 하였다. 이에 여러 달 동안 깊이 생각하느라 심기가 소모되어 병이 더욱 심해져 갔다. 그러자 자제들이 그만두라고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밀고 나가 해를 넘기고서야 상소를 다 이루었다. 상소를 올리고 나서는 의기가 펴져서 스스로 ‘속뜻을 유감없이 다 말하였다.’고 하였다.

그 당시의 논의가 바야흐로 서인을 지적하여 사당(邪黨)이라고 하였는데, 인걸은 동·서를 타파하고 어진 사람만을 등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삼사와 정원이 번갈아 글을 올려 상소의 내용이 잘못되었음을 논하면서 그가 늙어 올바른 정신이 아니라고 지목하였다.
【원전】 25 집 481 면

선조 12/06/28(임인):

사간원 정언 송응형(宋應泂)이 아뢰기를,

“지난번 백인걸(白仁傑)이 상소를 올려 시사를 논한 것 가운데 한 조목은 이이가 대술(代述)한 것임을 조정 사이에서는 들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음은 물론 대신 쓴 초고(草稿)를 직접 본 사람도 있습니다. 백인걸은 늙어 꼬부라진 사람이니 나무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경악(經幄)의 구신(舊臣)으로 산야에 물러가 살고 있으니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숨김이 없이 직접 진달해야 할 것인데 무엇을 꺼려 감히 자취를 숨기고 거짓 꾸며서 몰래 대술해서 천청(天聽)을 미혹하려 했단 말입니까? 이는 실로 바른 도리로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니기 때문에 신은 해괴함을 견디지 못하여 직접 들은 것에 의하여 그 죄를 논함으로써 신하들이 비밀히 속이는 곧지 못한 잘못을 바로 잡고자 했던 것인데 동료들에게 저지당하였으니 신의 소견이 어긋났습니다. 신은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대사간 권덕여(權德輿), 사간 임국로(任國老), 헌납 이양중(李養中), 정언 홍세영(洪世英)이 아뢰기를,

“백인걸의 상소 가운데 시사를 논한 한 조목은 바로 이이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이는 참으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요즘 조정에서는 화평을 위주로 하고 있는데 만약 이 일로 인하여 기필코 논핵하려 든다면 시끄러움이 더욱 심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그를 논박함에 있어 파직시키려니 휴직하고 초야에 있는 몸이요 추고하려니 공사(公事)에 간여된 것이 아니라서 별로 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송응형과 논의가 불합했던 것입니다. 지금 그가 피혐한 내용을 보니 자취를 숨기고 비밀히 속인 것이라고까지 배척했습니다만 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신들을 체직시겨 주소서.”

하였다.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니,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21 집 358 면

선조 12/07/01(을사):

이조 판서 이문형을 불러 하문하기를,

“들으니 경이 백인걸의 집에 갔을 적에 백인걸이 저번날의 상소는 바로 이이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했는데 이 말이 사실인가?” 하였다. 회계하기를,

“신이 백인걸의 집에 가서 만나보고 우연히 묻기를 ‘전일 상소 가운데 한 조목이 이이가 쓴 상소의 내용과 서로 동일한 곳이 있는데 왜 그런가?’ 하니, 백인걸이 답하기를 ‘이이와 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고 옥당의 차자에 답하기를,

“남을 시켜 상소하게 했다니 이는 실로 놀랍고 해괴한 일이다. 뜻이 비록 화평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이치상 그 죄과는 숨기기가 어렵다. 출사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원전】 21 집 358 면

선수 12/07/01(을사):

양사가 이이의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하지 못했다. 지난해 겨울에 이이가 파주(坡州)에 있었는데 백인걸(白仁傑)이 서울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극론하고 겸하여 동·서의 당론을 보합(保合)할 계책을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 사연이 자기의 뜻을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까 염려되어 이이를 통하여 그 내용을 잘 다듬게 하였다. 그러자 이이는 그의 나라 걱정하는 정성을 가련히 여겨 그의 말에 따라 대략 한 편의 문자를 만들어 보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인걸이 비로소 상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논한 동·서에 대한 한 조목은 이이의 문자를 많이 사용했는데 백인걸도 이러한 것을 사람들에게 숨기지 않았다. 허엽(許曄)·이문형(李文馨)이 백인걸을 찾아가 말하기를

“동·서를 논한 한 조목은 어찌 이이가 올린 상소와 그 뜻이 서로 같은가?” 하니, 백인걸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사류들은 이 사실을 시끄럽게 소문냈다. 이이는 당시의 인망을 받고 있었는데 동인들은 이이가 반드시 동인의 형세를 붙들어 주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상소하여 동인을 나무라자 동인들이 크게 성을 냈다.

정언 송응형(宋應泂)은 응개(應漑)의 아우인데 사람됨이 경솔 조급하고 무식하였다. 비록 가문의 명성과 세력으로 겨우 대간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사실상 당시에 인망은 없었다. 그는 이이가 사류에게 거스름을 당하고 있는 것을 엿보고는 기회를 틈타 공을 세우려고 가일층 명류들과 굳게 교제를 맺었는데, 드디어 팔뚝을 걷어붙이고 이이를 공격하면서 논의를 일으켜 탄핵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대사간 권덕여(權德輿) 등이 모두 말하기를,

“이 일의 허실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설혹 그런 사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것이 죄과가 되겠는가. 그리고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있는 사람을 또한 치죄하기는 곤란하다.” 하였다. 이에 대해 송응형이 강력하게 다투었으나 권덕여 등이 끝내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으니 응형이 피혐하며 아뢰기를,

“백인걸이 상소를 올려 시사를 논한 한 조목은 바로 이이가 대신 지은 것입니다. 백인걸은 칠십이 넘은 늙은 사람이니 나무랄 것이 없으나, 이이는 경악(經幄)의 신하로서 젊어서부터 유자라는 명망을 자부하고 있으니 물러가 산야에 살고 있더라도 생각한 바가 있으면 숨김없이 곧바로 진달해야 할 일이지 무슨 의심하고 꺼릴 것이 있기에 감히 자기의 자취를 숨기고 우회하여 대신 지어 천청(天聽)을 의혹시키려 한단 말입니까. 이는 실로 곧은 도리로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이 놀라움을 견딜 수 없어 그의 잘못을 탄핵하여 신하로서의 궤비(詭?)하고 정직하지 못한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였는데 동료들에게 저지당하였으니, 신의 소견이 잘못된 것입니다. 관직에 있을 수 없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권덕여 등도 동료를 데리고 피혐하기를,

“백인걸의 상소에 시사를 논한 한 조목이 과연 이이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이는 참으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조정이 한창 화평을 주장하고 있는데 만약 이 일로 인하여 기필코 논핵하기에 이른다면 시끄러움이 더욱 심해질까 두렵고 걱정스러웠기 때문에 송응형과 논의가 합치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취를 숨기고 궤비한 행동을 했다고 이이를 책했는데 신들의 뜻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와 소견이 각각 달랐던 것입니다. 직에 있을 수 없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대사헌 이식(李?) 등도 아뢰기를,

“이이가 상소를 대신 지은 사실은 이미 경연 석상에서 발론되었습니다. 신들에게는 말하지 않은 책임이 있으니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이보다 앞서 김첨(金瞻)이 경연에게 ‘이이가 소탈하여 백인걸의 상소를 대신지었는데, 이문형(李文馨)이 직접 인걸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하였다.】 홍문관이 장차 양사를 처치하려고 하였는데 교리 김우옹(金宇?)이 말하기를,

“송응형이 기회를 틈타 군자를 무함하려 하니 반드시 소인일 것이다. 마땅히 헌부와 함께 체직시켜야 한다.” 하였으나, 동료들이 그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우옹이 계속 극론하기를,

“이번 처치가 합당하지 않게 된다면 우리들도 반드시 소인이라는 이름을 얻을 것이다. 어찌 송응형 한 사람만 소인이 되겠는가.” 하였으나, 부제학 이산해(李山海), 응교 이발(李潑)은 양쪽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면서 두 편을 다 보전하려고 하였다. 이산해가 초(草)한 차자에,

“전파된 말이 혹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며 송응형의 소문 역시 명백한지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이는 스스로 소문을 믿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권덕여 등이 그의 의논을 따르지 않은 것은 참으로 공변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송응형이 탄핵하고자 한 것도 뒷 폐단은 있을지라도 그 역시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또 이식 등이 말하지 않은 것도 신중히 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무슨 잘못된 것이 있겠습니까.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문형을 불러서 하문하기를,

“과연 그런 일이 있는가?” 하니, 이문형이 아뢰기를,

“저번에 우연히 백인걸에게, 상소의 뜻이 이이의 상소 내용과 같은데 어떤 까닭이냐고 물으니, 백인걸이 ‘이이와 서로 통하여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밖에는 달리 들은 것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옥당에 답하기를,

“사람을 시켜 소장을 올리게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뜻이 비록 화평을 귀히 여겨서 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사리상 그의 죄실(罪失)을 엄폐하기는 어렵다. 출사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권덕여 등이 재차 피혐하기를,

“이이가 대신 소를 지었다는 말은 혹자들이 운운하고 있으나 그 사이의 곡절은 죄다 알 수가 없습니다. 신들의 뜻은 망령되이 화평만을 주장했고 또 송응형의 말이 지나쳤기 때문에 감히 그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도리어 억제했다는 비난을 받았으니 이제 구차하게 합치할 수가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응형이 또 피혐하기를,

“이이의 일은 실로 해괴한 것이기에 신의 뜻은 다만 그가 실수한 것을 논핵하여 망령된 행동을 경계하고자 한 것일 뿐이었는데 소신이 경솔하고 망령되어 말하는 사이에 과격한 병통이 있어서 이미 동료들과 서로 의견이 다르게 되었고 또 옥당의 기롱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사직하지 말라.” 하였는데,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송응형이 이이를 논핵하고자 한 것이 옳지 않은 것이 아닌데 권덕여 등이 따르지 않았으니, 형세가 서로 용납하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송응형은 출사하게 하고 권덕여 이하는 모두 체직시키소서.”

하였다. 이에 헌부가 장차 이이를 먼저 탄핵하려 하였는데 지평 기대정(奇大鼎)이 더욱 힘써 스스로 감당할 것을 주장하였다. 백인걸이 그 말을 듣고 놀랍고 부끄럽게 여겨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이이가 과연 신의 상소를 수식(修飾)하고 윤문(潤文)하기는 하였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송(宋)나라 정이(程?)는 팽사영(彭思永)을 대신하여 복왕(?王)의 전례(典禮)에 대해 논하는 상소를 지었고, 부필(富弼)을 대신하여 영소릉(永昭陵)에 대해 논하는 상소를 지었으며, 여공저(呂公著)를 대신하여 조서에 답하는 상소를 지었습니다. 이런 따위의 일을 선유들도 일찍이 해 왔던 것이기에 신은 이이의 글을 차용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향해서도 숨김없이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전하는 자들이 모두 이이가 신을 유도하여 상소를 올리게 했다고 한 것입니다. 신이 비록 형편없는 자이기는 하나 어찌 감히 신의 본래 의사가 아닌 것을 남이 시키는 것만을 따라 이 상소를 하였겠습니까. 늙은 신하가 죽을 나이에 다다라 감히 거짓을 꾸며서 전하를 기망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비로소 그 사실을 알고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살펴보고 비로소 그 수말(首末)을 알게 되었다. 경은 안심해도 좋다.” 하였다. 그렇게 되자 옥당은 헌부가 처치를 잘못한 것을 가지고 왁자지껄 그르게 여기니, 이식 등이 드러나게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도 참으로 전파된 말이 혹시 사실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송응형은 경솔하게 소문만을 믿고 부정(不靖)한 사단을 열고자 하였으며, 이식 등은 정당하지 않은 처치를 하였으니, 전혀 화평케 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였다. 이리하여 양사가 모두 다 체직되었다.

정지연(鄭芝衍)을 대사헌으로, 구봉령(具鳳齡)을 대사간으로 삼았는데, 정지연은 사양하여 체직시키고 이산해(李山海)로 대신케 하였다. 대중(臺中)에서 계속 이이를 헐뜯었으므로 홍혼(洪渾)이 상소하여 쟁변(爭辨)하려고 하니 유성룡(柳成龍)과 김우옹이 모두 정지시켰다. 우옹이 대거(對擧)하여 상소하고자 하자 홍혼 등도 곧 중지하였다. 좌상 노수신(盧守愼)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헌부가 만약 이이를 공격한다면 우리들도 당연히 헌부의 실책을 논계할 것이다. 어찌 공론이라고 하면서 군자를 해칠 수가 있는가.” 하였다. 그리고 수신이 동몽 훈도(童蒙訓導) 박형(朴泂)에게 묻기를,

“송응형이 이이를 공격하고 있는데 바깥의 의논은 어떠하던가?” 하자, 박형이 말하기를,

“시론(時論)이 비록 이공(李公)을 헐뜯고 있지만 이공은 훼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문하에 교유하고 있는 학도들이 3백∼4백 인이 되는데 내가 그들의 뜻을 시험하고자 하여 여러 사람에게 묻기를 ‘이공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그를 군자라고 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후일의 사림입니다. 한때 어떤 사람이 망령되게 헐뜯는다고 하더라도 후일의 공론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하니, 노수신이 참으로 그렇게 여겼다. 그 뒤에 경연 석상에서 박순과 더불어 상에게 아뢰기를,

“이이는 인품이 분명히 군자입니다. 비록 소탈한 실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헐뜯는 의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이이가 백인걸을 유도하여 상소하게 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나도 그를 그르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 사실을 들어보니 서로 의견만을 통하였을 뿐이었으니, 이것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동인들 중에 부박한 자들이 기필코 이이를 해치려고 하였는데, 대신과 김우옹이 큰 소리로 그들의 기를 꺾었기 때문에 끝내 자행하지 못했다.

이보다 앞서 사류의 명망이 동인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에 성세(聲勢)가 매우 확장되었고 그쪽으로 따라붙는 자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기편의 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면 선악과 재능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일체 받아들여서 수가 많은 것으로 이기는 것을 삼았다. 따라서 뒤에 온 자들이 다투어 전열(前列)을 배격하여 그들의 위에 나가고자 하였으므로 논의가 극히 각박하고 사납게 되었다. 그런데도 도리어 직절한 기풍을 훌륭하게 여겨 느긋한 논의를 하는 자는 도리어 그들의 밑에 굴하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백인걸과 이이처럼 덕망이 있는 어진 사람도 탄핵을 받는 일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공론이 동인을 일컬어 편당이라 하였고, 여항의 백성들도 모두 동인을 소인으로 지목하였다. 이발(李潑)과 김우옹(金宇?) 등은 그 말을 싫어하여 억지로 조정하여 화합하는 논의를 해서 조정이 조금 안정되었다.【이이가 사사로이 의논하기를 ‘심의겸은 외척 중 조금 두각을 나타낸 자일뿐이니 비록 사류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무슨 비중이 있겠는가. 그리고 김효원은 조금 재능이 있으나 학문이 아직 도(道)를 깨달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사림의 영수로 삼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이 두 사람의 시비에 대한 변론이 어찌 치란에 관계된단 말인가. 심의겸이 자신의 역량과 덕을 헤아리지 않고 국사를 하고자 한 것은 이미 잘못된 것이고, 김효원도 경솔하게 선배들을 헐뜯어서 상호간에 의심하여 사류가 두 편으로 나뉘어지게 하였으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일을 논한다면 두 사람이 모두 잘못이나 그 재능을 말한다면 두 사람 모두 유속(流俗)보다는 나으니 버려서는 안된다. 만약 효원이 우수하고 의겸은 용렬하다고 한다면 말이 되지만 만약 효원이 옳고 의겸은 그르다고 한다면 이는 사리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가령 두 사람에게 옳고 그름이 분명히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에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데 도리어 분변하고자 하여 양쪽의 논의가 분분하므로 인재를 못 쓰게 하고 국맥을 손상시켜 세상의 큰 화를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명(命)이 아닌가.’ 하였다.】
【원전】 25 집 484 면

선조 12/07/02(병오):

백인걸이 상소를 올리기를,

“시사를 논하고자 하였으나 글이 짧아서 뜻을 진달할 수가 없을까 저어하여 이이에게 보내어 윤색하게 한 것입니다. 정자(程子)도 남을 대신하여 저술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신도 혐의쩍게 여기지 않고 남에게 말을 전한 것입니다. 신이 비록 변변찮으나 어찌 자신의 뜻이 아닌 것을 남이 시키는 대로 따랐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살펴보고야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알았으니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원전】 21 집 359 면

선수 12/09/01(갑진):

지중추부사 백인걸(白仁傑)이 졸하였다. 인걸의 자는 사위(士偉)이고 호는 휴암(休庵)이다. 그는 늙어서는 관사(官事)를 맡지 않았으며, 서울에 있는 사대부들이 자신을 중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그것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녹봉미와 마초값[騶直]을 모두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보내고 왕래하고 유숙하면서 우러르는 회포를 붙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위독하자 상이 문병하고 의원과 약을 내려보내 치료케 하였다. 졸하자 하교하기를,

“어진 재상이 죽었으니 내 마음이 놀랍고 애통하다. 부의를 더욱 후하게 하라.”

하였다. 백인걸은 고매하고 소광(疏曠)하며 강개한 기백과 절의가 있었고 높은 뜻은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처음에 조광조를 스승으로 삼아 종신토록 한결같이 높이 사모하고 심복하였다. 을사년의 난(難) 때부터 만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 곧은 말로 항거하였는데 다른 사람은 감히 먼저 하지 못하였다. 그의 정직한 소리가 한때에 진동하였고 간사한 무리들도 역시 무섭고 두려워서 감히 그들의 분함을 풀지 못했다. 같은 때에 죄를 얻은 자들이 서로 잇따라 귀양가고 사사(賜死)되었는데 백인걸은 중도(中道)에 5년 간 정배되었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러 해 동안 곤궁하였으나 일찍이 뜻을 꺾지 않았고 만년에 등용되어서는 다시 시대와 뜻이 맞지 않았으나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은 머리가 희도록 변치 않았다. 일에 따라 선을 권하고 악을 못하도록 하되 반드시 그 뜻을 극진히 하였다. 나이 팔십이 넘어서도 오히려 강학에 힘을 써 밤낮으로 연구를 하되 성명(性命)에 관한 책이 아니면 읽지를 않았다. 그리고 집에 거처할 때에는 가난하고 검소하였으며 입고 먹는 것은 소략하고 거칠었는데, 먼지가 자리에 가득 쌓여도 쓸지 않았다. 상이 그의 기풍과 절의를 중히 여겨 끝끝내 총애하고 염려하였다.
【원전】 25 집 486 면

선수 16/08/01(경술):

유학(幼學) 신업(申?)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살피건대 전 병조 판서 이이는 본래 동인이나 서인에 속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바야흐로 심의겸(沈義謙)이 권세를 잡고 있을 적에 그는 병을 이유로 휴직을 하고 시골에 은퇴하였으니, 그 마음의 형적을 추구해 보건대 어찌 그가 척리와 결탁했다 하겠습니까. 그 뒤 동인이 국정을 맡은 이후로는 너무 심하게 서인을 억압하여 자기편에 붙는 자는 치켜올리고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였습니다. 그래서 지조 없는 신진들은 갈림길에서 관망하면서 형세의 경중을 살피다가 향배를 정하고는 기회를 틈타 이익을 추구하며 공격을 일삼았는데, 어진 이에게 해를 끼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에 이이와 백인걸(白仁傑)이 일시에 상소하여 그 폐단을 극진하게 진달드린 것인데, 이이의 본심은 공평하고 충성스럽고 협동하고 화합하는 뜻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동인들이 감정을 품고서 입에 모래를 머금고 그림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지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이이가 병조의 장관이 된 때는 마침 일이 많은 시기였는데, 마음과 힘을 다하여 자기가 아는 것은 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계획을 세운 것 가운데 한두 가지 소홀했던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임금을 무시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나랏일을 그르친 죄까지야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말하는 자들은 틈을 엿보고 있다가 대악(大惡)의 죄명을 덮어씌워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죄에 빠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처사(處士) 성혼이 망국의 조짐을 목도하고서 박양(剝陽)의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간곡하게 상소하고는 미련 없이 시골로 돌아갔던 것인데, 그 상소를 보면 강직하고 바른 도리에 입각하여 사심 없이 지극히 공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하는 자는 조금도 기탄 없이 이를 날조하여 무함하면서 물여우 같다고 지목하기도 하고 음흉하다고 지목하기도 하는 등 없는 죄를 꾸며내어 사지(死地)에 밀어 넣으려 하였습니다. 어찌 이러한 소인들이 전하의 조정에 발을 들여놓을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아, 이이와 성혼은 사림의 영수요 사문(斯文)의 뿌리로서 우리 도(道)가 그들 덕분에 실추되지 않고 학자들이 그들을 의지하여 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토록까지 무고를 당하였으므로 인심이 승복하지 않고 많은 사람이 격분하였습니다. 그래서 태학의 유생들이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강개한 마음으로 상소한 자가 수백 명이 넘었으니, 이야말로 온 나라의 공론으로서 사기(士氣)를 크게 떨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상께서도 이를 가상하게 받아들이시며 칭찬해 주셨던 것인데, 전하를 엿보고 있던 간사한 무리들은 전하께서 선비들의 말을 깊이 받아들인다고 하며 유학자의 갓을 쓰고 다니는 자제의 친구들에게 몰래 부탁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시세(時勢)에 영합하는 무리들이 밤늦게 돌아다니며 이익을 미끼로 당류들을 많이 모아 별도로 대항하는 논리를 세워 일망 타진할 계획을 이루려고 하였으니, 그 음흉하고 간사한 정상이 또한 너무나도 교묘했다 하겠습니다. 만약 그 주장이 시행되어 독사처럼 독을 뿜어댔다면 형곡(?谷)의 참변과 당고(黨錮)의 앙화가 진(秦)나라나 한(漢)나라 때에만 있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아, 어진 이가 서울을 떠나 나랏일이 이미 잘못되었는데, 북쪽 오랑캐는 승승장구의 기세를 타고 있고 간신들은 사림의 화를 일으키고 있으니, 혈기가 있는 자로서 그 누가 가슴아프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안으로는 박근원 등이 임금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의 귀를 가리고 있으며, 밖으로는 김응남(金應南)·우성전(禹性傳)·홍혼(洪渾)·김첨(金瞻)·김수(金?)의 무리가 조정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사사로이 당파를 만들어 뱀과 지렁이처럼 엉키어 결탁하고 있는데, 매와 사냥개처럼 그들의 사주를 받고 행동하는 자들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를 구슬리듯 임금을 꼼짝 못하게 하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 형적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데, 전하께서는 위에서 고립되고 있으니 지금의 나랏일을 알 만합니다.

신은 본래 썩은 선비로서 학문하는 올바른 방법을 알지 못한 채 과거 공부만을 일삼았는데, 늙도록 성취를 하지 못하고 게으른 습관만 몸에 배어 한가롭게 자신만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세가 있는 집에는 출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회합을 갖는 집에도 가본 적이 없으므로, 이이나 성혼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신은 사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공평한 마음은 또한 하나의 천리(天理)인 것이니 서로 친분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옳고 그른 판단이야 없겠습니까. 이미 그 사람이 충성스럽고 어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참소를 당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되니, 신은 실제로 애통함이 골수에 사무칩니다.

신은 듣건대 의구심을 갖는 자는 참소하는 말을 초래케 하고 과단성이 없는 자는 모든 억울한 일을 만드는 결과를 빚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야말로 전하의 병통을 적중시킨 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의구심을 가져 우유부단하지 마시고 성상의 마음으로 단정을 내리셔서 다음날 배꼽을 깨무는 후회가 없게 하소서. 전하께서 만약 이이와 성혼에게 죄가 있고 신의 말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여기신다면, 신의 머리를 베어 기망(欺罔)한 죄를 바로잡으소서. 신은 차라리 이이·성혼과 함께 같은 날 죽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건대 정성이 지극하고 충성심이 간절하다. 그대야말로 곧은 인물이로다. 지금 사기가 이와 같은 것은 진실로 조종께서 선비를 길러 놓으신 덕택인데, 조정과 변방 문제는 굳이 근심할 것도 못된다. 그대의 동생 신입(申砬)은 충성을 다해 나라를 보필하며 직접 변방의 성을 지키면서 오랑캐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옛날 양장(良將)의 풍도가 있고, 그대는 또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상소해서 간사함을 물리치는 특이한 절의를 지녔다. 그대의 집안은 어쩌면 이렇게도 충의심이 모두 넘쳐 흘러 나라를 위해 정성을 바치는가. 내가 가상히 여기며 찬탄하는 바이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신업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기망의 죄를 크게 받아야 할 자에게 도리어 칭찬해 주셨습니다. 눈을 어지럽게 하는 그의 주장이야 많은 변론을 할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지어는 조정 신하들을 차례로 거론하며 붕당을 만들어 임금의 귀를 가리고 있다고 하면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 사람에게 비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어찌 신업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을 협박하여 상소하게 한 일이 있겠습니까. 이 상소는 하낙(河洛)의 상소와 맥락이 거의 같은데, 이는 성상의 마음을 탐색하여 중상 모략하고자 하는 계획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청류의 화가 어찌 꼭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5 집 527 면

선수 20/03/01(경인):

시험삼아 논하겠습니다. 옛날 이른바 동인이란 사람은 심의겸을 배척하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은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사람이 동인이 되었고, 옛날 이른바 서인이란 사람은 심의겸을 구원하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은 이이와 성혼을 높이는 사람이 서인이 되었습니다. 외척을 배척하는 사람은 진실로 청의(淸議)라고 할 만하나 충현(忠賢)한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은 사류라고 할 수 없으며, 사사로이 사귀는 친구를 구호하는 사람은 진실로 편당한다고 할 만하나 유종(儒宗)을 존모(尊慕)하는 사람은 공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것이 시인(時人)이 발신(發身)하는 자본이 되었으므로 동인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으며 외척을 배척하는 것이 실로 사림 청류(淸流)의 논의이므로 선비로서 심의겸을 배척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동서의 이름이 전일과 달라서 분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 동서의 말이 있은 이래로 서인의 명목은 그 말이 네 번 변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심의겸의 친구와 제배(?輩)를 서인이라 하였으니 삼윤(三尹)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음에는 서인을 구원하는 자를 서인이라 하였으니 정철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동인도 아니고 서인도 아니며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서인이라 하였으니 이이와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림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을 서인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조야(朝野)의 공론을 지닌 사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사실에 의거한 말이겠습니까. 이러므로 공론이 열복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른바 서인이란 자가 오늘날에 와서 더욱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이이는 공론을 하다가 간사한 사람에게 펀당한다는 이름을 얻었고 성혼은 이이를 구원하다가 사적으로 구호한다는 이름을 얻었으며, 중외(中外)의 수많은 선비들은 이이와 성혼을 구원하다가 서인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백대의 공론은 속일 수 없지만 일시의 억울함을 당한 것은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아, 오늘날 이이를 공격하는 까닭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일개 심의겸을 말거리로 삼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신들이 무망(誣罔)한 정상을 일일이 조목조목 진달하여 공파(攻破)하겠습니다.

대개 이이는 심의겸과 족분(族分) 관계로 서로 알기는 하였으나 그와 친밀히 지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이가 전랑에 천거되었을 적에 심의겸이 저지하였는데 김계휘(金繼輝) 등이 힘껏 구원한 데 힘입어 해결되었으니, 다른 것은 논할 것 없이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이이가 본디 심의겸과 서로 좋게 지내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심의겸이 권력을 잡은 지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이이가 이때에 매양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가기를 요구하였고 한 달도 조정에 편안히 있은 적이 없었으니, 빌붙어 체결한 자가 과연 이러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이의 명성이 날로 성대해지자 한때의 사대부가 그와 얼굴을 알기를 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이가 때로 서울에 이르면 심의겸이 대중을 따라 와서 만나보았을 뿐입니다. 심의겸이 패망한 뒤에 전일 심의겸을 붙좇던 무리가 일시에 동인에게 복종하여 창을 거꾸로 들고 심의겸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사대부로서 심의겸과 아는 자는 모두 심의겸을 병을 전염시키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심의겸이 때로 혹 가서 보면 싫어하고 미워하는 빛을 나타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이이는 예전처럼 대우하여 가까이하지도 않고 멀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세상 인정이 가소로운 점인 동시에 이이가 말을 듣게 된 까닭입니다.

이발의 무리는 이이가 신사년에 심의겸을 끊지 아니한 것을 그르게 여겼습니다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도리 또한 한 가지 방법만이 아닙니다. 범연히 서로 아는 자가 있고 정면(情面)으로 서로 아는 자가 있고 심사(心事)가 서로 통하는 교분으로 사귄자도 있고 선(善)으로 책면하고 인(仁)으로 돕는 도의(道義)의 교분으로 사귀는 자도 있습니다. 이이가 심의겸에게는 족분 관계로 잘 대우하였을 뿐이고 당초 교분의 도리로서는 말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 심의겸의 대단한 죄악이 있음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한갓 시인(時人)에게 배척받는다는 것 때문에 그것이 자기에게 전염될까 염려하여 하루아침에 버리고 끊어 버리면 이것은 천장부나 하는 짓이요 또한 정인 군자의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만일 이이가 참으로 심의겸이 대고(大故)가 있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죄를 짓던 날에 끊어야 할 것이고 신사년에 끊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조헌(趙憲)이 이른바 ‘뜬말이 있은 뒤에 이이가 자취를 끊고 서로 찾아보지 않았다.’고 한 것은 어찌 심히 가소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뜬말로 인하여 곧 사람을 끊었다면 이것이 어찌 사군자가 사람을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그러나 이이가 심의겸에게 대단한 죄악이 있다는 것을 자세히 몰랐으나 또한 권세를 탐하고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김효원은 쓸 만하고 심의겸은 쓸 만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기묘년의 소장에 또 ‘동서를 탕척시키고 모두 재능대로 임용하더라도 심의겸은 다시 요직에 두어서는 안 된다.’ 하고, 심지어 ‘영원히 외척에게 권세를 주지 말라.’고 청하여 심의겸이 다시 들어오는 길을 막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올린 바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깊이 주의시켰으니, 이것이 과연 일호라도 심의겸의 처지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사람을 논함에 있어 마땅히 마음으로 해야 하고 상벌을 시행함에 있어 마땅히 형적으로 해야 하므로 심의겸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 일시의 서인 쪽 사류를 아울러 연루시켜 다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이이의 소견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유성룡·이발·김우옹의 무리도 전일 논한 바입니다. 계미년 성비(聖批)에 ‘심의겸은 간인이다.’라는 분부가 계신 것을 본 뒤에 이이 또한 비로소 의심하여 ‘이 사람이 권력을 탐하고 세도를 즐겨서 본디 수백(粹白)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가 척리(戚里)임을 빙자하여 임금께 죄를 얻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궁금(宮禁)의 일은 비밀스러워서 외신(外臣)이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또한 의심할 따름이고 억측할 따름이었습니다. 만일 이이가 심의겸을 알지 못한 것을 죄로 삼는다면 유성룡·이발·김우옹의 무리와 그 책망을 같이 받아야 합니다. 어찌 이이만 탓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로써 살펴보면 그의 마음과 형적이 해와 별처럼 환하게 밝으니, 어찌 한 점인들 의심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아, 이이가 심의겸과 안 것을 시배가 애당초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심의겸이 배척당하던 초기에 그의 제배들은 당여(黨與)로 지목받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이이만은 감히 지목하는 가운데 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온 조정이 서로 번갈아가며 천거하되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한 것은 애당초 친밀한 형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동인의 지론이 편중된 데 이르러 이이가 홀로 동서를 타파하자는 논의를 주장하면서 들뜨고 조급한 무리를 통렬히 억제한 뒤에야 좋아하지 않는 자가 비로소 많아졌고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이이가 심의겸과 사적으로 지낸다.’ 하더니, 계미년 이후 비로소 함정으로 몰아넣고서 당여로 지목하였습니다.

아, 이이는 한 사람입니다. 이이의 덕업(德業)과 경술(經術)을 위에 천거한 것도 시배이고 징소(徵召)하기를 계청한 것도 시배이고 차자를 올려 머물게 하도록 청한 것도 시배이고 오늘날 배척하여 얽어 모함하는 것도 시배입니다. 아, 시배에게 거스르기 전에는 이이가 도학과 경륜이 있는 대현(大賢)이 되었다가 시배에게 거스르게 된 뒤에는 이이가 사악한 붕당을 만든 소인이 되었으니 어찌 앞뒤로 헐뜯고 칭찬함이 이처럼 서로 반대된단 말입니까.

이이가 참으로 심의겸과 체결하고자 하였다면 마땅히 심의겸이 뜻을 얻고 있던 때 체결했어야 하는 것이지, 의겸이 실세한 뒤에 체결한다는 것은 부당한 말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심의겸이 패하기 전에는 이이가 전원에 물러나 살면서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는 쉽게 여겼습니까. 경진년에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들어오던 때에는 심의겸이 실세한 지 이미 오래되어 먼 외방으로 쫓겨났고 동인이 바야흐로 시론을 주장하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이이가 체결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논의를 주장하고 있는 시배에게 이견을 세우고 실세한 심의겸에게 체결하였겠습니까. 하물며 ‘체결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사리 사욕을 이루려는 것이니, 자기의 사리 사욕을 이루지 못한다면 또한 무엇 때문에 체결하겠습니까.

아, 시배의 기세가 치성할 때에도 오히려 끌어들여서 당여로 삼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세상이 천하게 여겨 버려버린 심의겸이 끌어들여 당여로 삼을 수 있었겠습니까. 일신의 영욕과 화복도 오히려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절조를 변개하게 할 수 없는데, 스스로를 도모하지도 않는 사람이 더구나 심의겸을 위해 도모하겠습니까. 이이의 삼사는 오직 이와 같았으므로 선세(先世)의 대부(大夫) 백인걸(白仁傑)같은 이도 특별히 이이와 성혼을 천거하여 특립독행(特立獨行)하는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백인걸은 사조(四朝)의 숙덕(宿德)이며 을사(乙巳)의 유직(遺直)으로 일찍이 심의겸을 배척한 것은 국인이 아는 바입니다. 만일 이이와 성혼이 조금이라도 심의겸에게 오염된 형적이 있었다면 어찌 외척에게 편당하는 사람을 국가를 위해 현인으로 천거함으로써 전하를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이와 심의겸이 본래 친밀한 형적이 없었음을 여기에서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아, 시배로서 이이를 공격하는 자가 어찌 모두 시세에 빌붙어서 충현(忠賢)을 시기하는 자들이겠습니까. 그 가운데에도 마음가짐이 조금 공정하나 정의(情意)가 막혀서 이이의 심사를 모르는 자도 있겠고 식견이 밝지 못하여 시배의 논의에 동요되지 않을 수 없는 자도 있겠고 또한 신진 후생으로 붕당의 논의에 오염되어 그른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 자도 있겠고 또한 마음으로는 시론(時論)을 그르게 여기면서도 역량이 부족하여 남을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는 자도 있겠고 또한 시종 곡절을 전혀 알지 못하고서 대중을 따라 뇌동한 자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하루아침에 깨달으면 또한 반드시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스스로 뉘우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

대저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오직 의(義)와 이(利) 이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특립독행하여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며 부귀를 사모하지 않고서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는 쉽게 하는 사람은 군자로서 의리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시세에 빌붙어서 자신을 보존하고 지위를 튼튼히 하며 작록을 탐하면서 나아가기는 쉽게 하고 물러나기는 어렵게 여기는 사람은 소인으로서 이익을 좋아하는 자입니다. 오직 이익만을 좋아할 뿐이므로 이익이 외척에게 있으면 외척에게 빌붙고 이익이 권간(權奸)에게 있으면 권간에게 빌붙고 이익이 시론(時論)에 있으면 시론에게 빌붙어서 오직 이익이 있는 것만 보고서 향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기미를 쫓아가고 향기를 따라서 가지 않는 곳이 없고, 파리처럼 이익을 찾아다니고 개처럼 분주히 쏘다니어 몰아 내버려도 다시 돌아옵니다. 심한 경우에는 이익이 아내와 자식을 죽이는 데에 있으면 아내와 자식을 죽여가며 추구하고, 이익이 임금과 아비를 시해하는 데에 있으면 임금과 아비를 시해하면서 빼앗으니, 이것은 이익을 좋아하는 자들의 일입니다.

오직 의리만을 좋아할 뿐이므로 이익이 외척에 있어도 빌붙지 않고 이익이 권간에게 있어도 빌붙지 않고 이익이 시론에게 있어도 빌붙지 않고 오직 의리의 있는 것을 보아 그를 따를 뿐입니다. 그리하여 영화로와도 즐거워하지 않고 곤욕을 당하여도 놀라지 않고 불러도 오지 않고 내몰아도 가지 않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의리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데에 있으면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의리가 일족이 멸하는 데에 있으면 일족이 멸하여도 사양하지 않으니 이것은 의리을 좋아하는 자들의 일입니다.

아, 의리를 좋아하는 자는 나라를 위하고 이익을 좋아하는 자는 자신을 위합니다. 이익을 좋아하면서 임금을 사랑하는 자는 있지 않고 의리를 좋아하면서 임금을 버리는 자는 있지 않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오늘날의 사대부 가운데 누가 군자로서 의리를 좋아하는 자이겠으며 누가 소인으로서 이익을 좋아하는 자이겠으며 누가 부귀를 사모하지 않고 나아가기는 어렵게 하고 물러나기는 쉽게 하는 자이겠으며 누가 작록을 탐하고 나아가기는 쉽게 하고 물러나기는 어렵게 여기는 자이겠으며 누가 시세에 빌붙어서 자신을 보존하고 지위를 튼튼히 하는 자이겠으며 누가 특립독행하여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는 자이겠습니까.---
【원전】 25 집 557 면

선조 29/10/21(갑신):

상이 별전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정의 간사함이 심하다. 만일 행장(行長)과 청정(淸正) 등 흉악한 자들을 사신으로 삼아 많은 왜적이 올라오면 사태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비변사는 미리 강구하여 잘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성중에 한 사람의 장수나 병사도 없는데, 저들이 갑작스레 악독한 행동을 자행하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적은 작은 일에는 순종하는 것같이 하나, 큰 일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간계(姦計)를 부립니다. 신은 변상(邊上)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한심스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치병(治兵)이 어그러져서 아직도 모양을 갖추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만 경상도의 경우 왜적의 침입을 당한 지 이미 오래 되어 저들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항오(行伍) 사이에 분주하고 있으니, 적과 대처한다면 몰라도 현재의 상황으로 본다면 그래도 쓸 만한 듯합니다. 호남(湖南)은 구규(舊規)가 남아 있었는데 요역이 번중함으로 인해 인심이 흩어져서 호령(號令)과 기강(紀綱)이 무너져 서지 못하니, 혹시라도 변고가 있게 된다면 이런 사졸들을 끌고서 장차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삶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은 연후에야 웃사람을 친애하며 목숨이라도 버리는 법입니다. 이미 항심(恒心)이 없고 보면 아무리 그들을 엄중한 법으로 묶어놓는다 해도 태연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모두 떠나버릴 계획만 갖고 정착해 있을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니, 한번 고향을 떠나고 나면 바로 도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백성의 생활이 곤핍하다는 말은 곧 선비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고 성상께서도 필시 이 일을 보통일로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신이 직접 자세히 보고 왔는데 왜가 물러간다 하더라도 국가의 근본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크게 걱정스럽습니다. 일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염두에 두소서.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일처리에 급급한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을 다스리는 것이니,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고서야 무슨 일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수령(守令) 중 훌륭하지 못한 자에 대해서는 신이 매번 더욱 검칙(檢?)하였으나, 현저하게 드러난 범죄가 없는 이상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당초의 생각으로는 신이 올라온 뒤에 계달하여 시행하는 일이 당연히 있게 되리라 여겼었는데, 이제 상께서 또한 허락해 주시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일이 서로 견제되어 행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기인(其人)에 관한 일만 해도 계하하신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방해와 장애로 인하여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공물(貢物)에 관한 일로 충청 감사(忠淸監司) 유근(柳根)이 목천 현감(木川縣監)을 신에게 보내어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로 왔던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전에는 각 고을의 공물을 목면(木綿)으로 평균하여 사주인(私主人)에게 지급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상납하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전규(前規)에 의거하여 납부할 것을 독촉하고 있지만 목면이 매우 귀하기 때문에 모든 계책을 다 써도 목면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별도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그 물건 값을 계산하도록 신에게 계달하여 변통케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색(本色)으로 상납하게 할 수는 없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전복(典僕) 등이 상사(上司)에 납부할 때 인정(人情)을 바치는 것을 고달파하여 이와 같이 남징(濫懲)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외간의 사사로운 의견은 본색(本色)을 그대로 바치게 하되 호조(戶曹)로 하여금 납부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여 사주인(私主人)이 방납(防納)하는 폐단을 없애게 하고, 작목(作木)은 법대로 상납시키는 것이 마땅하며 사주인에게 급부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납의 폐단이 이미 고질이 되었는데, 우상(右相)의 의견은 별도로 차사원을 정하여 스스로 공물을 납부하게 하면 폐단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전에 들으니, 백인걸(白仁傑)이【인걸은 선조(先祖) 대의 유직(遺直)으로 관직이 찬성(贊成)에 이르다.】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을 때, 시탄 공물(柴炭貢物)을 자신이 직접 관할하여 납부하였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농간을 부릴 수 없었으므로 양주의 주민들이 공물이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역시 차사원을 별도로 정하되, 이와 같이 한다면 폐단을 막을 수 있겠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인걸과 같은 명사(名士)라면 가능하겠지만 미관 말직에 있는 관리들이야 필시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 【사신은 논한다. 국가의 기강이 느슨해지고, 나라의 법도 쓸어버린 듯 없어져 해관(該官)은 직무에 태만하고 하리(下吏)는 문서를 조작하며, 중간에서 사주인(私主人)이 일을 저지르는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 뇌물을 핑계하고 크게 해독을 부려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수량이 본색(本色)보다도 더 많으니, 민생(民生)이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익(元翼)은 전하가 마음을 비운 날을 당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폐단을 통렬히 혁파하고 유신(維新)의 정사를 크게 베풀었어야 마땅한데도, 도리어 사세에 얽매여 누적된 폐단을 결연히 제거시키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원전】 23 집 85 면

선조 36/09/03(병진):

종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 모여 작고한 재신(宰臣) 중에서 염근(廉謹)한 자 7인을 뽑았는데, 판서 이우직(李友直), 우의정 심수경(沈守慶),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영의정 최홍원, 판서 이기(李?), 우참찬 백인걸(白仁傑), 북병사 장필무(張弼武)였다.
【원전】 24 집 532 면

선조 37/04/04(갑신):

홍문관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생각건대 지난번에 태학생(太學生)들이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하는 일로 잇따라 소장(疏章)을 올려 주청했던 것은 장보(章甫)들의 사론(私論)이 아니라 온 나라의 공론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상께서 사문(斯文)을 숭상하여 교화를 일으키시는 이 때에 즉시 융숭하게 보답하는 은전을 내려 인심을 선하게 하고 선비들의 추향을 밝히는 근본으로 삼으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삼가 성비(聖批)를 보니 마치 이언적(李彦迪)의 일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신 듯했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놀랍고도 이상하여 성상의 의도를 알 수 없기에, 삼가 그의 언행(言行) 중에 표표하게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는 것을 수습해서 차자를 올려 성명께서 질정해 주시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정원에 내리신 분부를 받들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성상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범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신(人臣)이 진퇴(進退)할 적에는 대의가 엄격하여 감히 범할 수 없는 바, 다시 그 사이에서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관찰할 적에는 그가 속한 당(黨)을 통해 살펴본다.’고 한 말은 옛 성인의 교훈입니다. 그의 자취만을 가지고 그의 마음까지 의심하는 것은 또한 과오를 보고 그 사람됨을 아는 군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동방은 해외의 나라로 세상에 이름이 있는 유현(儒賢)이 몇 사람이나 됩니까. 겨우 몇 분 있다가 그나마 끊어져 버린 뒤에 온 세상 사람들이 높이 떠받들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만 좋지 못한 이름이 가해지고 말았습니다. 왕언(王言)이 한번 내려지자 사방에 전파되어 사기(士氣)가 저상(沮喪)되고 사문(斯文)이 적막하게 되었으니, 치도(治道)에 관계됨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신들은 지극히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신들은 모두 후생들로서 60년이 지난 지금 그 간의 사적(事跡)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거할 만한 문적(文籍)이나 고로(故老)들이 서로 전해오는 야담(野談)을 상고해 보더라도, 갑진년과 을사년에 두 분 선왕께서 잇따라 승하하시고 명종(明宗)께서 아직 어리셨을 때 뭇 간신들이 감정을 품고 귀신이나 물여우처럼 화란(禍亂)을 일으켰던 사실은 삼척 동자도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언적이 어찌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기미를 보고서 멀리 떠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두 분 선왕께서 알아주셨고 벼슬이 숭반(崇班)에 올랐었기 때문에 의리상 국가와 더불어 휴척(休戚)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 말하자면 산릉(山陵)을 아직 완성하지 못하여 국사에 겨를이 없었고, 사세로 말한다면 안팎에서 난을 선동하고 있어 종사(宗社)가 위태로왔습니다. 이런 때에 자신만을 깨끗이 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만 알고 두 선왕의 은덕을 생각하지 않고서 관직을 벗어 던지고 훌쩍 떠나버렸더라면 군신간의 의리에 어떠하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떠나버리지 않은 점을 놓고 볼 때, 그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한결같이 측은(惻隱)한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 거짓 자신을 위해 도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더욱 알 수 있습니다.

충순당(忠順堂)에서 소대(召對)하시어 여러 재상들을 따라 들어갔을 적에 적신(賊臣) 이기(李?)가 흉악한 음모를 마구 부려 세 신하를 죄주자고 청했습니다. 그때 천위(天威)가 진동하여 누가 감히 조금도 거스를 수 없었는데, 이언적이 ‘당시 마음을 다해 대행왕(大行王)을 섬기던 사람을 어찌 죄줄 수 있겠는가. 또한 일을 할 때는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등의 말을 성의껏 순순(諄諄)하게 반복해서 진달하여 위로는 모후(母后)께서 받아들이시도록 감동시켰고 아래로는 늙은 적신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문정 왕후(文定王后)께서 ‘경의 말이 참으로 타당하다. 사림(士林)에 화가 생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시며 격려 하셨고, 이기 등도 감히 다시는 독설(毒舌)을 펴지 못하였으며, 세 신하의 죄도 단지 귀양보내고 파직시키는 데 그쳤던 것입니다. 그 뒤에 백인걸(白仁傑)이 헌납으로 있으면서 밀지(密旨)의 잘못을 내계(來啓)하고 전령(傳令)하는 군졸(軍卒)처럼 쫓아다녔다고 민제인(閔齊仁)을 배척하였는데, 이로 인해 더욱 논의가 격렬해져서 한때의 양사가 모두 견파(譴罷)되고 세 신하에게도 다시 죄를 더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어 권발(權撥)의 서계(書啓)가 있었는데, 서릿발처럼 엄하여 간담을 서늘케 했으므로 노적(老賊)이 스스로 인심이 이처럼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 살육하여 안정시키려 함으로써 드디어 사림을 도륙하고야 만 것입니다.

이언적의 정밀한 학문과 넓은 지식으로 가만히 앉아서 시국을 익히 헤아려 보았을 것인데, 묵묵히 참으며 감히 말을 다하지 않았던 것이 어찌 그의 본심이었겠습니까. 한 마디 신구(伸救)를 하자 바로 화만 한 등급 더 내려질 뿐이었으니, 당시의 일은 참으로 참혹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때에 경솔하게 무익한 말을 했다가 더욱 사림의 화를 재촉하게 되었다면, 신구하려는 것이 도리어 화만 더할 뿐이었으니, 또한 무슨 이익이 되었겠습니까. 자신의 말 때문에 사림의 화를 재촉하게 되는 일은 군자로서 차마 하지 못할 일이므로 차라리 마음을 썩이고 간장을 태우며 간정(艱貞)의 경계를 스스로 지키게 된 것이니, 권발의 서계 초고(草稿)를 고친 일에서 보면 그 은미한 뜻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국문(鞫問)에 참여한 한 가지 일에 있어서도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언적이 금오(金吾)의 장관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형세상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뭇 간흉들이 참소하는 말을 날로 하여 유언비어가 난무하였으므로, 천성이 자애로우신 문정 왕후이셨지만 믿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양 ‘우리 모자(母子)가 고립되어 망할 날이 멀리 않았다.’고 하시며 한창 의심이 깊어지셨었는데, 김명윤(金明胤)의 고변(告變)이 그때 마침 올라왔고 계림군(桂林君)은 이미 집에 없었습니다. 그가 바야흐로 ‘기미를 알고서 먼저 도망했다.’고 구실을 삼았고 보면, 종사에 관계되는 일로 죄목이 지극히 무거운 것인데, 언적이 어떻게 미리 실정을 헤아리고서 망명한 사람을 신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덕응(李德應)이 거짓 자복한 뒤부터 그 옥사가 드디어 이루어져, 없는 죄를 꾸미고 얽어서 제현(諸賢)에게까지 파급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언적이 충정을 다해 호소했다고 한들 과연 하늘을 뒤덮을 듯한 기세를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물며 ‘스스로 편치 못하여 형적(形跡)이 있었다.’는 등의 말은 당시 제일의 죄안(罪案)이었습니다. 이언적이 인종(仁宗)의 구신(舊臣)으로서 스스로 형적을 보전해 피해 버리고 참여하지 않았다면, 군상(君上)의 의심을 더 받게 되고 뭇 간흉들의 노기를 격발시키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천지와 같은 아량을 넓히시고 일월과 같은 총명을 넓히시어, 유현(儒賢)을 좋아하는 성의를 다시 돈독히 하시고 도를 중히 여기는 교화를 더욱 힘쓰소서. 그 연유를 관찰해 보고 안착(安着)한 바를 살펴 보시며, 그의 행적을 추구해 보고 그의 실정을 용서하소서. 의심하여 막힌 생각을 시원하게 풀어버리시고 존중하여 장려하던 뜻을 변치 마시어, 선비들이 본받을 바가 있어 흥기되도록 하신다면, 국가에 이보다 다행이 없고 유림(儒林)에도 이보다 다행이 없게 될 것입니다. 임금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논한 말에 참으로 그러한 점이 있다는 것을 두루 알았다. 지난번에 유생들이 상소하여 종사(從祀)를 청했을 적에, 그가 현명하기는 했지만 종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라고 의심해 경솔하게 망령된 말을 했던 것인데, 대중의 의심과 논란이 분분히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내 소견을 써서 계하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60년 전의 일이라 이목(耳目)에 미치지 못하고 사적도 알지 못하는 데다 고찰할 만한 서책도 없었기에 그만 연월의 선후에 어두워 전도된 말이 많았었다.

대개 이언적이 정자(程子)가 되든 주자(朱子)가 되든 내게 해로울 것이 없는데 망령되이 시비를 논하여 분분하여 만들었으니, 나는 아무 병도 없으면서 스스로 뜸을 뜨는 사람이라 하겠다. 이언적의 현명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다시 더 유의하겠다. 종사하는 일에 대해서는 뒷날 조정에서 반드시 의논하여 처리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 마디 할 말이 더 있다. 주자가 확정해 놓은 《대학장구(大學章句)》는 온 천하가 다같이 주종(主宗)으로 삼는 것으로 문황제(文皇帝)가 우리 동국에 오경(五經)과 사서(四書)를 반사(頒賜)했는데, 이언적이 그 장구를 바꾸어 놓았으니, 그에 대한 설명을 들려 주기 바란다. 이언적이 이미 주자를 논의했는데, 어찌 이언적을 논의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이는 진실로 흠이 없는 사람에게서 흠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종사하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시비를 밝히지 않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옥당의 차자는 말이 완곡(婉曲)하고 의리가 바르다. 사실에 의거하여 정직하게 변론해 구구절절 매우 분명하니 논사(論思)하는 도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데, 임금의 뜻이 오히려 석연찮게 여겨 마침내 사기(士氣)가 저상되고 유림(儒林)이 실망하게 하였으니, 매우 한탄스러운 일이다.】
【원전】 24 집 599 면

선수 36/09/01(갑인):

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 모여 고(故) 재상 가운데 염근(廉謹)한 사람을 뽑았는데,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우의정 심수경(沈守慶), 영의정 최흥원(崔興源), 우참찬 백인걸(白仁傑), 판서 이우직(李友直)·이기(李?), 병사(兵使) 장필무(張弼武) 등 7인이었다.
【원전】 25 집 691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