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시조(中始祖) 창직(昌稷)  

시조 백우경(白宇經)은 중국 소주(蘇州)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첨의사 좌복야 사공 대사도 등을 지내다가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780년 (선덕왕 1)에 신라에 귀화하여 계림의 자옥산 아래 (지금의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에 살면서 신라에 벼슬하여 대상에 이르렀다.

그가 자옥산 아래에서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워 거처하고 있는데 선덕왕이 친림하여 만세암을 정혜사라 개명하고 어필로 영월당의 현판에 <경춘>이라 쓰고 사운시를 지어 주어 이를 각자해서 걸었다고 한다.

묘소는 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 자옥산에 있고,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한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중간 세계를 연계하지 못하고 신라 경덕왕 때 중랑장을 지낸 창직(昌稷)을 1세조로 하고 있다.

 

과거에는 창직을 시조의 14대손으로 연계하여 계대한 적도 있었지만 시조의 입국 연대와 창직의 활동 연대를 따져 볼 때 불과 140여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사리에 맞지 않으므로 창직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본관은 수원(水原) 단본이다. 문헌에는 수원 외에 남포(藍浦), 직산(稷山), 임천(林川), 태천(泰川), 적성(赤城:순창(淳昌)), 문경(聞慶), 청도(淸道), 해미(海美), 남해(南海), 해안(海岸:대구), 개성(開城), 선산(善山), 대흥(大興), 부여(扶餘), 태인(泰仁) 등 10여 본이 전해 지고 있으나 모두 한 핏줄이므로 <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를 발간할 때 각 파의 대표들이 모여 수원으로 단일화하기로 합의한 후 대부분 수원을 본관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보령의 이재공<이정>파 후손들은 남포로 쓰고 있고, 대흥, 청도, 부여, 임천, 태인 등으로 칭관하는 파도 있으나 그 수는 많지 않다.

백씨는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해 많은 석학과 명유를 배출한 기호지방과 관서지방의 문벌가다.

문간공(文簡公) 백문절(白文節)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 국자좨주를 지냈다.

1269년 복위한 원종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 폐위 사실을 감추려고 그에게 전왕이 병으로 물러났다는 표를 쓰라고 했으나 눈물로 간하여 사실대로 원나라 황제에게 알리게 하였다.

충렬왕 때 국학 대사성 보문각 학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백이정은 안향(安珦)의 문인으로 충선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서 10여 년간 있으면서 주자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에게 전수, 우리나라 성리학의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은 상의회의 도감사에 이르고 상당군에 봉해졌다.

충간공(忠簡公) 백문보(白文寶)는 공민왕 때 왕자사부 정당문학 등을 지내고 직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선조에서는 문과 급제자 80명, 공신 2명, 장신 2명, 청백리 1명을 배출했다.

문과 급제자를 본관별로 구분하면 수원 65명, 선산 3명, 대흥과 남포에서 각 2명, 직산 해미 개성 홍성에서 각 1명, 본관 미상이 4명이다.

백수장(白壽長)은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으로 정해군에 봉해졌고, 백응범(白應範)은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여 호성공신으로 한남군에 봉해졌다.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중종∼선조대의 명신이요,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중종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와 많은 동문을 중종 때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많은 동문을 잃고 금강산에 들어가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뒤에 문과에 급제, 선조조에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청백리에 녹선된 관리로 벼슬을 그만두자 끼니조차 끓이지 못할 정도로 청빈해서 조정에서 쌀을 내려 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성격이 강직하고 소신이 굳은 그는 명종 때 윤원형(尹元衡)에게 미움을 사서 파직을 당하기도 했고, 대사헌으로 있을 때는 조정의 권신들을 거리낌없이 논책했다.

그의 형 인호(仁豪) 와 4촌인 인영(仁英) 인웅(仁雄)등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4백문장>이라고 불렸다.

 

조선조에서는 주로 이들 4종형제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수원백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백인영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호조참판에 이르렀고, 인걸의 아들 백유함(白惟咸)은 선조조에 의정부 사인이 되었으나 1591년 세자 책봉을 놓고 당론이 일어나 정철(鄭澈) 등 서인이 물러날 때 그는 경흥으로 유배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호군 으로 명사(明使) 정응태(丁應泰)를 접대, 일본과의 강화를 논의하다가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인호의 아들 백유양(白惟讓)은 선조 때 부제학을 지내다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 나자 아들 수민이 정여립의 형인 정여흥(鄭汝興)의 딸과 혼인한 사실 이 밝혀져 유배되어 죽었다.

 

백인호의 후손에서는 대대로 무관이 많이 나왔다.

숙종 때 무과에 급제,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경종조에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 일파가 노론의 4대신을 유배시킨 신임사화(辛任士禍)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충장공(忠莊公) 백시구(白時耉)는 인호의 5대손 이다.

이 사화에 화를 입은 삼장신과 오절도사를 세칭 <팔곤수>라 하여 <팔곤수집>으로 경모되어 왔다.

백시구의 손자인 참판 백사근(白師謹) 판서 백사은(白師誾) 형제의 자손 4대가 거의 모두 무과 출신 이어서 <무관집>으로 유명했다.

그 중 사은의 아들 백동원이 순조 때 훈련대장, 사근의 손자 백은진(白殷鎭)이 철종 때 어영대장, 동원의 증손자 백낙윤(白樂倫)이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또한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은 선조 때의 시인으로 문필로 1세를 풍미하여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과 더불어 <삼당>으로 일컬어졌고, 그의 아들 백진남(白振南)도 당대의 시객으로 명성으로 떨쳤다.

광훈의 형 백광홍(白光弘) 역시 시문에 뛰어나 그의 작품 <관서별곡(關西別曲)> 은 국문학사에 빛나는 작품이다.

 

근세 인물 가운데는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을 떠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기독교 세례를 받고 최초의 전도사로 최초의 순교자가 된 백홍준 (白鴻俊),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백용성(白龍城), 2 8독립선언 주동자의 한 사람인 백관수(白寬洙), 주중 일본대사 아리요시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무기형을 받고 복역중 옥사한 백정기(白貞基) 등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