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 우경(宇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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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의 시조 우경(宇經)의 자(字)는 경천(擎天)이며 호(號)는 송계(松溪)이시다.
공은 원래 당(唐)나라 때 소주(蘇州) 사람으로 인품(人品)이 고결(高潔)하고 학문이 뛰어나 당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관작(官爵)이 첨의사(僉議事)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모함을 당하자 스스로 당나라를 떠나 신라(新羅)로 건너오시니 때는 신라 선덕왕(宣德王)원년(元年:당의 덕종(德宗)원년), 서기 780년 경신년(庚申年)이었다.
시조 송계공(松溪公)이 신라조정에 누린 관작(官爵)은 이조(李朝) 세종조(世宗朝)의 명신 황공희(黃公喜)가 지은 영락보(永樂譜) 서문에 <위지대상(位至大相)>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기해대동보(己亥大同譜) 원계편(遠系篇)과 시조 송계공의 망단비(望壇碑)에도 『신라의 벼슬이 좌복야사공 대사도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은 계림(鷄林) 자옥산(紫玉山) 아래에 영월당(迎月堂)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거처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왕이 어느 날 몸소 찾아와 암자(庵子) 이름을 정혜사(淨惠寺)라고 고쳐 짓고 스스로 붓을 들어 영월당(迎月堂) 현판에 경춘(景春)이라고 썼다 한다. 또한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주기에 그것을 액자에 새겨 걸었다고 하나 세월이 워낙 오래 되어 전해지지 않아 유감이다.
당나라 황제(皇帝)가 여러 차례 돌아오라고 불렀으나 공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송계공은 이미 신라국정에 깊이 관여하며 제자들을 많이 모아 가르치는데 전념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공이 신라의 학문을 일으키고 학문에 힘쓰다 신라에서 서거(逝去)하니 향년 73세였다. 공의 묘(墓)는 옥산(玉山) 남쪽 기슭에 있으며 인근 주민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묘를 백정승묘라고 말하고 있다.
송계공의 묘는 실전(失傳)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공의 음덕과 후손들의 열(熱)과 성(誠)으로 우리는 1965년에 공의 묘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후손들은 그 묘역(墓域)을 중수(重修)하고 제단비(祭壇碑)를 세웠다. 1975년에는 화수회(花樹會) 중앙총본부가 주관하여 시조의 재실(齋室) 건립에 착수, 완공하고 영월당(迎月堂)이라 이름하니 진정 우리 백씨의 경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일에 전국 일가들이 물심양면에 걸쳐 헌신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들은 해마다 양력 5월 첫째 일요일을 시조 송계공의 제일(祭日)로 정하고 전국의 일가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며 시조 송계공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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