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길(白   吉)

자(字)는 태초(太初), 정남장군(征南將軍)을 역임.

백   정(白   靖)

삼중대광우간의대부(三重大匡右諫議大夫).

백입승(白立昇)

당나라 서주대도독 대윤 금자광록대부(徐州大都督 金紫光祿大夫).

백   상(白   尙)

자(字)는 여화(汝和), 애장왕시대 한주태수.

백   영(白   永)

시호(諡號) : 문원(文元), 당나라 첨의사 금자광록대부, 패강장성(浿江長城) 삼백리 구축.

백연복(白延福)

시호(諡號) : 충정(忠正), 어사대부 대도독부마(御史大夫 大都督駙馬).

 

백   탁(白   卓)

병부시랑(兵部侍郞), 고경문 해독(古鏡文 解讀).

백사유(白思柔)

호(號)는 퇴은(退隱), 시호(諡號) : 문정(文正), 한림학사(翰林學士) 간의대부 영주어사(永州御使).

백사홍(白思弘)

상장군(上將軍)을 역임.

백사청(白思淸)

태복경(太僕卿) 증 삼중대광대부.

백   휘(白   揮)

자(字)은 경열(慶悅), 호(號)는 포주(浦洲), 시호(諡號)는 청헌(淸獻), 16세에 장원급제하여 내봉감(內奉監)을 지내고, 목종(穆宗)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源君)에 봉해졌으며, 문종(文宗)때 평장사(平章事)가 되고 문명이 높았다.

백광우(白光宇)

병부외랑을 지냈다.

백광신(白光臣)

고려의 문신. 판비서성사,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제고(知制誥)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수태위(守太慰)로 치사한 최당(崔 )과 그 아우 수태부(守太傅) 선(詵) 및 태복경(太僕卿)으로 치사한 장자목(張自牧)등과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 유유자적했다. 희종 초에 최충헌(崔忠獻)이 문사들을 모아 시부(詩賦)와 화운(和韻)으로 회합을 열었을 때 불려가 그 등차(等次)를 매겼다.

백간미(白簡美)

자(字)는 신보(愼甫), 호(號)는 월곡(月谷), 시호(諡號)는 정민(貞愍), 광록대부 판병부사(判兵部事) 감수국사(監修國史) 대장군(大將軍) 보국사 등 6조에 걸쳐 벼슬을 지내고 영해(寧海)로 낙향하였다. 문종이 여러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백행미(白行美)

형부시랑(刑部侍郞)을 지냈다.

백가미(白可美)

태자사부(太子師傅)를 지냈다.

백가신(白可臣)

1096년 하정사(賀正使)로 요나라에 다녀오고 1100년에 송나라 철종이 죽자 조위사로 갔다가 귀국할 때 신의보구방(神醫補救方)을 가지고 돌아왔다. 태자태보 내사령 겸 지어사대사가 되고 평장사에 이르러 치사하고, 홍주로 낙향 노후를 보냈다.

백이정(白이正)

1247(고종 34)∼1323(충숙왕 10). 충선왕 때의 유학자.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彛齋).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문절(文節)의 아들이며 안향(安珦)의 문인이다.
1275년(충렬왕 1) 문과에 급제, 충선왕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겸하였고 뒤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298년 원(元)이 사신을 보내어 세자를 왕으로 삼고, 8월에 왕을 불러가자 충선왕을 따라 원의 연경(燕京)에서 10년간 머물러 있었는데, 그동안 주로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였고, 귀국할 때 정주(程朱)의 성리서적과 주자의 《가례 家禮》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뒤 후진양성에 힘써서, 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이곡(李穀)·이인복(李仁復)·백문보(白文寶) 등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으며, 도학과 예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하여 크게 일가를 이룬 이는 백이정이라 할 수 있다.
안향과 백이정의 학통은 이제현에게 전승되었고, 이제현은 이색(李穡)에게, 이색은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으로 이어졌다.
선조 때 김제남(金悌男)·최기남(崔起南) 등이 송경(宋京)에 서원을 세워 안향·권보(權溥)와 함께 배향하기로 경기사림(京畿士林)과 논의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였지만, 남포의 신안원(新安院), 충주의 도통사(道統祠), 진주의 도통사(道通祠), 남해의 난곡사(蘭谷祠)에서 향사하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평리 양각산(羊角山)에 있으며, 신도비 등이 남아 있다. 유고로는 〈연거시 燕居詩〉·〈영당요 詠唐堯〉·〈한벽루 寒碧樓〉·〈여홍애집구 與洪厓集句〉 등의 시구가 전해지고 있다.

⊙이재 백이정선생과 난곡사

백천장(白天藏)

호(號) : 묵와(默窩), 시호는 문익(文益)이다. 문과에 등과하여 정당문학을 역임하고 원나라에 유학하여 한림학사ㆍ이부상서ㆍ우승상에 올랐다. 귀국후 수원백에 봉해지고 85세에 서거하셨다.

백문보(白文寶)

자는 화부(和父), 호(號) : 담암(淡菴), 시호는 충간(忠簡) 충숙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겸열을 거쳐 우상시가 되었다. 공민왕때 전리판서ㆍ밀직제학 등을 역임하고 뒤에 세자사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직산군에 봉해졌다.

백인경(白仁景)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였다.

백   장(白   莊)

자(字)은 명윤(明允), 호(號)는 정신재(靜愼齋), 진사로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이부전서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원주 치악산으로 들어가 은거햇다. 조선이 개국되고 태조가 불렀으나 거절하여 해미로 유배되었다.

 

백   회(白   繪)

보성현감 좌익원종공신 2등공신

백대선(白大璿)

자는 군옥(君玉), 조선시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백   공(白      )

자는 경사(景思), 조선시대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다.

백상화(白尙華)

연안군수 밀직부사

백정화(白正和)

어모장군 명천부사

백사수(白思粹)

1454년(단종 2) 문과에 급제한 후에 장단부사, 예빈시부정, 승문원참교 등을 지내고, 1455년(단종 3) 좌익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백귀선(白貴璇)

조선시대 부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백정수(白精粹)

자는 소화(素和), 조선시대 부사를 지냈다.

백익근(白益瑾)

자는 여용(汝用), 조선시대 참의를 지냈다.

백익견(白益堅)

호는 성화(成化), 조선시대 세자사부를 지냈다.

백명항(白命恒)

조선시대 도승지를 지냈다.

백인성(白仁盛)

자는 치서(致瑞), 시호는 충장(忠莊), 조선시대 방어사를 지냈다.

백인걸(白仁傑)

1497(연산군 3) - 1579(선조 12)
조선의 유학자.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 세자사부 익견(益堅)의 아들, 인호(仁豪)의 아우. 조광조의 문인.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스승과 동지를 모두 잃고 금강산에 입산, 그후 돌아와 153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오래 머무르다가 검열 예조좌랑 남평현감 호조정랑 지평 헌납을 역임했다.
1545년(명종 원년) 을사사화 때 윤원형 등 소윤의 미움을 사서 파면되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안변에 유배되었다.
1551년 풀려나와 오랫동안 고향에 은거하다가 윤원형이 죽자 복직, 1567년(명종 22) 71세의 나이로 교리가 되었다.
선조 때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으로 동지경연사 동지의금부사를 겸임, 다시 대사헌이 되어 권신들을 논핵하다기 사임했다.
15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듬해 동서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군비강화를 강조했다.
선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학문에 뛰어났다. 남평의 봉산서원, 파주의 용주서원과 파산서원, 고창의 월암서원에서 제향, 초시(初諡)는 충숙(忠肅), 개시(改諡)는 문경(文敬).

백인무(白仁武)

조선조에 임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백인국(白仁國)

1530(중종 25)∼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덕첨(德瞻), 호는 족한당(足閒堂).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 당(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영해박씨(寧海朴氏)로 첨정(僉正) 의원(義元)의 딸이다.
처음에는 종조숙부(從祖叔父)인 심(琛)에게 수학하였고 뒤에 이천계(李天啓)·김언기(金彦璣)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성일(金誠一)·남치리(南致利) 등과 학문적인 교류가 있었다.
1571년(선조 4) 천거에 의하여 선교랑(宣敎郎)에 제수되었고, 그해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574년 진잠현교관(鎭岑縣敎官)이 된 뒤 평해(平海)·연일(延日)·고령(高靈)·김해 등지의 교관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권전(權銓)과 합세하여 축산(丑山)에서 적을 격파하는 한편, 외아들인 민수(民秀)를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보내 참전하게 하였다.
권춘계(權春桂)·유성룡(柳成龍)·황응청(黃應淸)·안여지(安汝止) 등과도 교분이 두터웠으며, 만년에는 후진교육에 주력하였다.
저서로는 《족한당문집》이 있다.

백인영(白仁英)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언화(彦華). 익장(益長)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경남(崔慶男)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 식년문과에 갑과 2등으로 종제 인걸(仁傑)과 함께 급제하였다.
1539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41년 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이 되었다.
이듬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어 대사헌 정순붕(鄭順朋) 등과 함께 윤임(尹任)과 윤원형(尹元衡)의 죄과를 비호하는 데 앞장섰으며, 곧 다시 내자시정(內資寺正)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다시 사헌부장령이 되어 종실인 봉성군(鳳城君)의 죄를 들어 멀리 찬배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같은 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 시독관(侍讀官)이 되어 과거시험을 감독하였으며, 곧이어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이 되었다.
1547년 군자시정(軍資寺正)이 되었는데, 왕명으로 평안도의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1549년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고, 1553년 내섬시정(內贍寺正)이 되었으며, 이듬해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우승지를 역임한 뒤 도승지가 되었다. 그 뒤 1564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백흥종(白興宗)

조선시대 이조좌랑을 역임하였다.

백유양(白惟讓)

1530(중종 25) - 1589(선조 22)
조선의 문신. 자는 중겸(仲謙), 부사(府使) 인호(仁豪)의 아들이며, 인걸(仁傑)의 조카이다.
1572年(선조 5)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81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이어 강원도어사(江原道御使),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지내고 1588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 1589년 병조참판·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인자하였으며 사정(邪正)의 시비를 가려낼 때에는 의논이 강직하여 남에게 굴하지 않아서 명망이 두터웠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아들 수민(壽民)이 정여립의 형 여흥(汝興)의 딸을 아내로 삼았던 탓으로 연좌되어 사형당하자 사직하였다.

백유함(白惟咸)

1546(명종 1) - 1618(광해군 10)
조선의 문신. 자는 중열(仲悅), 대사헌 인걸(仁傑)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찬(安璨)의 딸이다.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에 등용되고, 이어서 정자(正字)·박사·부수찬·지제교(知製敎)를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
1583년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584년 이조정랑이 되었다
당쟁을 중재하던 이이(李珥)가 죽자 그도 당쟁을 피하여 벼슬을 버리고 용안(龍安:龍仁)의 농장에 내려가, 그곳에 있는 백운암(白雲庵)에 들어가 교학(敎學)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평정되자 다시 예조정랑으로 복직되었다.
헌납이 되자 역적 정여립 등과 사귄 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인물들을 갈아치우도록 소를 올려 시행되었다.
다시 이조정랑을 거쳐 검상(檢詳)·사인(舍人)이 되었다.
1591년 왕세자 책봉문제로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의 주장에 동조하다가, 정철이 물러나자 그도 경성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흥으로 옮겨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가 풀려 의주로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직제학으로 복직되었다.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을 조달하라는 특수임무를 부여받고 동분서주하면서 윤승훈(尹承勳)과 함께 군량미 2만석을 조달하였고, 이어서 정주에서도 많은 군량미를 모았다.
그 해 10월 성균관사성이 되어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직하였다.
1593년 함경도에서 왕자를 왜군에게 잡히게 한 황정욱(黃廷彧)을 탄핵하였다.
1594년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황주목사로 나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잘 어루만져 치적을 남겼다.
1596년 우리나라의 실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호군(護軍)이 되어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를 접반하였다.
정응태는 그에 대한 접대가 소홀함을 난문하면서 전쟁과는 상관이 없는 나라의 체통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것은 조선이 한낱 왕국에 불과한데,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묘호(廟號)를 사용하고 있음은 황제를 능멸히 여기는 행위가 아니냐는 트집이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조선왕의 묘호는 국초부터 당당히 사용하여온 것임을 강조하였다.
광해군초에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으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에 고향 용인(龍仁)에 방환(放還)되었다가 1617年(광해군 9) 신원(伸寃)되어 개성(開城)에서 죽었다.

백맹동(白孟冬)

자는 자홍(子洪), 조선때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백충언(白忠彦)

자는 언지(彦之), 호는 상의당(尙義堂), 조선시대 좌랑장을 지냈다.

백수장(白壽長)

자는 팽조(彭祖), 1498年(연산군 4) 과거(科擧)에 급제,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功)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정해군(貞海君)에 봉(封)해졌다.

백민수(白民秀)

자는 기원(起元), 호는 술고당(述古堂), 경서(經書)와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은 학자(學者)였다. 16세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문위세(文緯世)와 함께 의병거사(義兵擧事)를 합의하고 수백(數百)의 장정(壯丁)을 이끌고 좌의장(左義將) 최경회(崔慶會) 군(軍)과 합세하여 장수(長水)지역에서 크게 승리(勝利)하였고, 금산(錦山)으로 달려가 권율(權慄)장군을 도와 이치(梨峙)에서 대첩(大捷)을 거두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도 문세위와 합세하여 경북 용담(龍潭) 등지에서 많은 왜적을 죽이고, 전공(戰功)을 세웠다.
선무훈(宣武勳)에 책록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되었다.

백상영(白尙瑛)

자는 윤미(潤美), 호는 영천(寧川), 조선 때 선전관을 지냈다.

백응상(白應祥)

자는 성서(聖瑞), 호는 여재(旅齋), 조선시대 예빈시 부정을 지냈다.

백몽표(白夢彪)

자는 성서(聖瑞), 조선시대 무과에 급제한 후에 선전관을 거쳐 동래판관을 지내고, 어모장군 오위도총부에 재직하여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백세흥(白世興)

1630(인조 8)∼1699(숙종 2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가원(可遠), 호는 율은(栗隱).원발(源發)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경훈(慶薰)의 딸이다. 1652년(효종 3)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복상(服喪)문제로 상소를 올리려 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귀향하여 학문연구에 힘썼다.
1675년(숙종 1) 문과에 급제, 봉상시 겸 성균관학유(奉常寺兼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다.
그 뒤 양현고봉사(養賢庫奉事)·성균관전적 등을 지냈다.
1678년 이후에는 해남현감·강진현감·평해현감 등에 재임하면서 검약한 생활과 애민정신(愛民精神)으로 존경을 받았다.
저서로는 《율은문집》이 있다.

백광홍(白光弘)

1522(중종 17)∼1556(명종 11). 조선 중기의 문인.
자는 대유(大裕), 호는 기봉(岐峯).아버지 세인(世仁)과 어머니 광산김씨의 장남으로 장흥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아우 광안(光顔)과 광훈(光勳) 및 종제 광성 등 한 집안 4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칭송을 받았다.
1549년(명종 4) 28세로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55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홍문관정자로 임명되고, 1553년 호당(湖堂)에 뽑혔다.
그 뒤 1555년 봄에 평안도평사가 되어 〈관서별곡〉을 지어 그곳의 생활상과 자연풍물을 읊었다.
이듬해 1556년 가을에 병이 들어 벼슬을 내놓고, 귀성하는 도중 음력 8월 전라북도 부안에서 객사하였다.
천생자질이 뛰어나고, 뜻이 높아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며 행실이 올바른 성품이었다.
자라면서 이항(李恒)에게서 학업을 배우고, 김인후·이이·신잠·기대승·임억령·정철 등과 같은 당시의 대문장가들과 도의로써 사귀었다. 특히 〈관서별곡〉은 정철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보다 25년이나 앞서 지은 작품으로 기행가사의 효시가 되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08년(순조 8) 기양사(岐陽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기봉집》이 있다.

백광훈(白光勳)

1537(중종 32) - 1582(선조 15)
조선의 시인.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 세인(世仁)의 아들. 박순(朴淳)의 문인. 어려서 시재(詩才)가 있어 13세 때 상경(上京), 양응남(梁應南), 노수신(盧守愼)등에게 사사(師事)했다. 1564年(명종 19)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수(山水)를 즐기며, 시서(詩書)에 열중했다.
1572年(선조 5)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써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사신을 감탄케 했다. 1577年 처음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靖陵), 예빈시(禮賓時),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냈다. 당시의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과 함께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성당(盛唐)의 시풍(詩風)에 들어갔다 하여, 삼당(三唐)으로 불렸다. 명필(名筆)로도 알려졌는데 특히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1590年 강진(康津)의 서봉서원(瑞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백광안(白光顔)

? - 1592(선조 25)
조선의 무관. 호는 풍암(楓巖), 시호는 충민(忠愍), 태인(泰仁)출신. 일찌기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1589年(선조 22) 북청판관(北靑判官)을 지내고 1592年 모친상(母親喪)을 당해 집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주(公州)에 달려가 군대를 해산하려는 이광(李洸)의 마음을 돌이켜 그와 함께 전주(全州)에 가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용인(龍仁) 전투에서 조방장(助防將)으로 선봉이 되어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병조판서에 추증(追贈), 모충사(慕忠詞)에 제향(祭享)되었다.

백광조(白光祖)

조선의 무신. 첨절제사(僉節制使) 광종(光宗)의 종제(從弟). 17세에 무과(武科)에 급제, 1627年(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의주용골성(義州龍骨城)에서 적을 무찔러 수문장(守門將)이 되고, 1630年 가도(假島)의 유흥치(劉興治)가 의주를 침공할 때 이를 섬멸하였으며, 1636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공을 세워 훈련주부(訓練主簿)가 되었다. 1639年 초선장사(抄選壯士)로 사신을 따라 심양(瀋陽)에 가서 사재를 털어 포로로 잡혀간 수천 명의 동포를 구해서 귀국케 하고 만호(萬戶)를 거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백   형(白   珩)

자는 중온(仲溫), 조선시대 어모장군을 지냈다.

백응희(白應希)

자는 광삼(光三), 호는 우산(又山), 1586년(선조 19)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수문장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싸움터에서 죽었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백현룡(白見龍)

1556(명종 11) - 1622(광해군 14)
조선의 학자. 자는 문서(文書), 호는 성헌(惺軒), 고려의 정당문학(政堂文學) 문보(文寶)의 후손. 이황(李滉)의 문인.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등과 학문 교유(交遊)가 있었다. 1592年(선조 25) 임진왜란때 영해(寧海)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가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위, 난이 끝난 후 벼슬을 바라지 않고 자연을 벗하며 학문에 전심, 1543年(중종 38) 67세에 비로소 진사(進士)가 되었다.
운산서원(雲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성헌집》이 있다.

백진남(白振南)

1564(명종 19) - 1618(광해군 10)
조선의 시인. 자는 선명(善鳴), 호는 송호(松湖), 광훈(光勳)의 아들. 15세때 사학(四學) 과시(課試)에 시부(詩賦)로써 뛰어나 이이(李珥)도 보고 이를 칭찬할 정도였다. 1590年(선조 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597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진중(陣中)으로 피란했다. 명나라 장군 계금피(啓金皮), 승덕(承德)등이 그의 시를 보고 크게 찬탄했다. 1606年(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에 관반(館伴) 유근(柳根)의 천거를 받아 백의(白衣)로써 사신을 영접했다.
문장과 필법(筆法)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주지번은 그의 필적을 보고는 절찬하며 소중히 간직했고, 주지번의 필적을 선사받기도 하는등 서로 교의가 두터웠다.

백거의(白居毅)

조선시대 의병(義兵)이다.

백광종(白光宗)

조선의 무장. 거간(居簡)의 아들. 1627年(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의주용골성(義州龍骨城)에 들어가 참모가 되어 의병(義兵) 5천을 모집, 극력 방위하여 많은 적을 살상한 공으로 그 곳 수령(守令)이 되었다. 가도(가島)의 유흥치(劉興治)가 1만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의주에 내습하자 이를 무찌른 후 유흥치를 살해했다. 그후 조총(鳥銃), 궁시(弓矢), 창검(槍劒)등을 제조하여 변방 경비에 대한 공으로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승진 이어 김유의 천거로 아이진첨절제사(阿耳鎭僉節制使)가 되었다.
순조때 의주의 용현사(龍峴祀)에 제향(祭享)되었다.

백홍제(白弘悌)

1572(선조 5) - 1646(인조 24)
조선의 용사(勇士), 효자(孝子). 자는 여순(汝順), 우윤(右尹) 천민(天民)의 손자. 의(義)를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쓰는 협기(俠氣)와 강용(强勇)으로 알려졌다. 1592年(선조 25) 임진왜란 때 적을 피해 노모(老母)와 함께 산중에 들어갔다가 적에게 포로가 되어 적선(敵船)속에 끌려갔으나 적의 칼을 빼앗아 배 안의 왜적을 모두 죽이고 포로로 잡혀있는 70여명과 함께 귀국, 이 공으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가 되었다.

백수회(白受繪)

1574(선조 7) - 1642(인조 20)
조선의 문신. 자는 여빈(汝彬), 호는 송담(松潭), 임진왜란 때 포로로 9년간 일본에 억류되었다가 귀국후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여러번 상소하여 맹렬히 비판했다. 인조 반정(仁祖反正 : 1623)후 예빈시참봉(禮賓侍參奉),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지냈다.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追贈), 양산(梁山)의 송담서원(松潭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백대형(白大珩)

1575(선조 8) - 1623(인조 1)
조선의 문신. 자는 이헌(而獻), 수종(守宗)의 아들. 1591年(선조 2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이듬해 제용감참봉(濟用監參奉)이 되고 1599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북평사(北評事), 형조좌랑(刑曹佐郞), 감찰(監察),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등을 지냈다. 광해군때 희천군수(熙川郡守), 형조정랑(刑曹正郞), 황해도 관찰사, 동부승지(同副承旨),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백홍일(白弘一)

곡산공(谷山公) 1603~1684

자원(子元)이며 문신과 무신을 겸하여 국가에 공헌한 충신이다.

효민(孝民)의 아들이며, 인걸(仁傑)의 증손이다

예산현감을 거쳐 가평군수를 지냈으며 무관으로서 국가보위의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역임하고 이어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승차했고, 말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곡산부사(谷山府使)에 제수됐다.

추원제(追遠齊)에서 제향하다.

백시구(白時耉)

1649(인조 27)∼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덕로(德老). 원진(元振)의 아들이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다가 1680년(숙종 6)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1684년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북로(北路)의 봉수(烽燧)를 조사하여 허술한 곳을 수축하게 하였다.
이어 초계군수가 되어서는 교육정책에 힘썼으며, 1708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717년 함경도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절도사로 있을 때 군기들을 잘 수선하여 갖추어두고 병사들의 훈련에 힘써 국방에 주력하였다.
경종이 즉위하고 김일경(金一鏡) 등이 정권을 잡자, 노론의 구신들을 몰아낼 때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기로소(耆老所)에 백금을 빌려준 일이 있는데 이 일로 반대파에 의하여 옥에 갇히고 문초를 받았다. 김일경·목호룡(睦虎龍) 등에 의하여 신임사화가 일어날 때 이를 기화로 김창집(金昌集)의 죄상을 조작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심문에 단호히 불복하였다.
결국 고문에 못이겨 옥사하였으나, 뒤에 1741년(영조 17) 영조가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불태우고 탕평책을 쓸 때에 그의 관직을 복구하고 몰수하였던 재산도 후손에게 돌려주었으며 호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유저(遺著)로는 《충장부군시고 忠莊府君詩稿》 1책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백종걸(白宗杰)

1800(정조 24)∼1876(고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긍첨(兢瞻), 호는 지산(止山).한성부좌윤 경해(慶楷)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통덕랑(通德郎) 득서(得瑞)의 딸이다.
김익환(金益煥)에게 수학하였다. 1831년(순조 31)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에 임명되었고, 1835년(헌종 1) 출륙(出六)되어 전적(典籍)에 승진되었다.
그 뒤 예조정랑·사직서영(社稷署令)·지평(持平)·병조정랑 등을 거쳐 1839년 문천군수(文川郡守)가 되었다.
1846년 내직(內職)으로 돌아와 다시 병조정랑 등을 거쳐 1855년(철종 6)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가 되었고, 1861년 통정대부에 승자(陞資)되어 부호군이 되고 병조참지를 거쳐 병조참의에 승진되었다.
1868년(고종 5) 우부승지가 되었다가 사직,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시문에도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지산문집》이 있다.

백원의(白元義)

? - 1627(인조 5)
조선의 무장.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1627(인조 5) 정묘호란 때 옥강만호로 의주의 남성장이 되어 포대 3백여명으로 수많은 적을 살상하여 적으로부터 비장군(飛將軍)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화살이 떨어져 백병전으로 싸우다가 전사했다.

백원항(白元恒)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문신.
중랑장(中郎將)을 지낸 진생(眞生)의 아들이다.
일찍이 안향(安珦)으로부터 “뒷날에 반드시 귀현(貴顯)하리라.”는 말을 들었다.
1279년(충렬왕 5)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1311년(충선왕 3) 선군(選軍)을 둘 때 지언부사(知언部事)로서 별감사(別監使)가 되었다.
이때 사복영사(司僕令史)를 매를 쳐서 죽인 것으로 영흥도(靈興島)에 귀양갔다.
뒤에 풀려나 전교령(典校令)이 되었고, 1314년(충숙왕 1) 윤신걸(尹莘傑)·윤선좌(尹宣佐) 등과 함께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진강(進講)했다.
1317년 총부전서(摠部典書)로 동고시관(同考試官)이 되어 진사(進士)를 뽑아 홍의손(洪義孫) 등을 급제하게 했다.
1321년 밀직사(密直使)가 되었다가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으며, 그해 박효수(朴孝修)와 함께 상왕 충선왕의 환국을 요청하는 글을 써서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보냈으며, 또 옹인(饔人) 한만복(韓萬福) 등이 충숙왕의 비(妃) 복국장공주(복國長公主)의 사인(死因)이 왕의 구타에 의한 것이라는 진술이 무고임을 밝히는 글을 써서 원나라 중서성에 보냈다.
그 해 김순(金恂)·윤석(尹碩) 등과 함께 상왕 충선왕의 신임을 받고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아 거만(鉅萬)의 부(富)를 누리던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을 귀양보냈다.

백세준(白世俊)

자는 군식(君式), 조선시대 판관을 역임하였다.

백문진(白文晋)

자는 화국(華國), 호는 양우재(養愚齋), 조선시대 선전관을 지냈다.

백후채(白後采)

자는 덕현(德顯), 호는 연거처사(淵居處士), 조선시대 학자로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백호인(白灝寅)

자는 윤집(潤集), 호는 난정(蘭汀) 조선때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백남규(白南圭)

1884(고종 21)∼1970. 한말의 의병.
자는 성삼(成三), 호는 운암(雲庵). 경상북도 예천출신.일찍이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안동진위대 부위를 지냈다.
1907년 한국군이 강제해산당하자 경상북도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800명을 거느리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때 강원도 횡성의 봉복사(鳳復寺)에서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을 만난 뒤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이강년 의진의 우선봉이 되었다.
그 해 7월 제천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려 도선봉장(都先鋒將)이 되었고, 8월에는 모두령(毛頭嶺)·유수산, 문경의 갈평 등지에서 크게 승전하였다.
9월에는 영월 사리치(寺里峙)에서 선유원(宣諭員) 홍우석(洪祐錫)의 100여명의 수비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1908년 6월 이강년이 적에게 붙잡히자 군사지휘권을 장악한 김상태(金尙台)로부터 의병 1지대를 분급받아 서벽·내성·아산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12월 죽산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고 8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하였다.
1918년 상해(上海)로 망명하려다가 잡혀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백홍인(白弘寅)

자는 자행(子行), 호는 세심당(洗心堂), 1905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거할 것을 결의, {포고(布告) 8도 사민서(士民書)}를 남도(南道) 제읍(諸邑)에 배포(配布)하고 제주도(濟州道)로 가다 발각되어 장흥헌(長興憲)에 수감(收監)되었다. 그 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문인(門人) 40여명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 의거(義擧)할 것을 획책하다가 웅치순검청(熊峙巡檢廳)에 수감되었다.

백성기(白性基)

1860(철종 11)∼1929. 조선 말기의 무신.
자는 효천(孝天), 호는 소송(小松). 한성부판윤 겸 경연특진관 남익(南益)의 아들이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고종 19) 남행선전관(南行宣傳官)으로 관로에 오르기 시작해서 같은해 무과에 급제한 뒤 승진을 거듭하여 승선(承宣)·철산부사(鐵山府使)·내금위장(內禁衛將)·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경상좌도병마절도사·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고, 1895년 갑오개혁 때 제정된 육군계급제도에 따라 참장(參將)에 임명된 뒤 군부협판·갑산관찰사(甲山觀察使)·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평리원재판장 및 군법기초위원을 지냈다.
독립협회 활동시에는 간사부에 소속되어 활동한 개화파 무관의 한 사람이었으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신식 군제 설치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개편으로 인해 군정의 문란함이 극도에 달하게 되자 1900년 군정교구(軍政矯구)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는 고종이 원수부(元帥府)에 실시토록 영을 내려 일련의 군제 정비가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육군법률 317조가 1900년 9월 제정되면서 육군법원이 설치되는 등 군사법제도가 완비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심역할을 한 이후 육군법원장·원수부군무국총장·기록국총장·검사국총장·평안북도관찰사·교육부참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말 경무사(警務使)를 겸하고 있던 중 일제침략에 저항하는 상민배(商民輩)를 탄압하지 않았다고 하여 해임당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 때 민영환(閔泳煥)과 함께 극간(極諫)하였으나 대세의 흐름이 돌이키기 어려운 것을 깨닫고 수원(水原)으로 퇴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백경한(白慶漢)

? - 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절신(節臣)
조선의 의사(義士), 시호는 충강(忠剛), 자는 자점(子漸), 호는 부호(鳧湖), 선양(善養)의 아들아들이며, 어머니는 해주노씨(海州盧氏)로 현진(玄軫)의 딸이다.
최경림(崔敬林)에게서 배웠으며, 1811년(순조 11) 12월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 정주가 난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동지를 규합하여 정주성내의 적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사방에 보내고 신안충의군(新安忠義軍)이라는 기를 세워 의병을 불러모으면서, 한편으로는 적정(賊情)을 안주병사영(安州兵使營)에 밀보하여 내응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약속을 어기고 오지 않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홍경래가 입성하면서 그를 맨 먼저 체포하였다.
그러나 그의 명망을 높이 산 난군은 투항시키려고 여러가지로 협박을 다하였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다가 거짓 항복하고서 다시 관군과 밀통하다가 탄로되어 1812년 1월 마침내 피살되었다.
난이 평정된 이듬해 정주성 남쪽에 단을 세워 그를 포함한 일곱 의사를 제사지내게 하고, 아울러 순절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정주의 표절사(表節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부호집》 8권이 있다

백경해(白慶楷)

1765(영조 41) - 1842(헌종 8)
조선의 문신. 자는 성익(聖翊), 호는 수와(守窩), 선양(善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노현진(盧玄軫)의 딸이다.
1786년(정조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학유(學諭)가 되고, 이어 전적(典籍)·좌랑(佐郎)을 거쳐 1811년(순조 11) 평안도도사가 되었다.
이때 심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동태가 심상하지 않음을 들어 감찰사에게 구휼의 방책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정주(定州)의 집에 있다가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형 경한(慶翰)에게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게 하고 평양에 돌아갔다.
그러나 운산군수(雲山郡守)에 임명되자 밤을 이용, 임지에 이르러 군민을 효유(曉諭)하고 영변(寧邊)과 연락하여 의려(義旅)를 규합하던 중 형 경한의 순절소식을 들었다.
이에 더욱 분개, 대군을 재촉하여 정주성을 함락시켰으나 형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자 의복을 갖추어 장사지내고 이로부터 죽을 때까지 정주성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뒤 태천현감(泰川縣監)이 되어 난리의 화로 피폐된 민생을 진제(賑濟)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무고를 입어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장령에 기용되었다.
그 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으며, 저서로는 《수와집》 3권이 있다.

백광호(白光瑚)

1639(인조 17)∼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여기(汝器), 호는 가소당(可笑堂).홍원(弘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주소씨(晉州蘇氏)로 현문(顯門)의 딸이다.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88년(숙종 14) 오도일(吳道一)과 함께 윤선거(尹宣擧)·윤증 부자를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가납되지 않았다.
재실(齋室)을 지어서 후학지도에 전념하였으며, 입교(立敎)·명륜(明倫)·흥학(興學)의 세가지 조목을 세워 종족(宗族) 교육에 힘썼다.1710년 학행으로 익위사(翊衛司)의 세마(洗馬)에 천거되었으나 반대파의 방해에 의해 좌절되었다.
평소 《소학》을 독실히 읽어서 문장보다는 궁행하는 데 힘썼다.당쟁의 심화로 정치형태가 점차 어지러워짐을 염려하여 정치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등 초야에서도 끝내 정치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저서로 《가소당집》이 있다

백시원(白時源)

1776(영조 52)∼?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이화(而華), 호는 노포(老圃).평안도 정주에서 살았으며, 이직보(李直輔)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가 평안도의 가산(嘉山)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듬해 격문(檄文)을 써서 각처에 돌려 창의기병(倡義起兵)하고는 모여든 민병(民兵)을 거느리고 관군과 합세하여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반란이 진압되자, 조정에서 그의 공로를 참작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의 관위를 내렸으나 받지 않았고, 또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181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에야 비로소 관계에 진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문한(文翰)이 흡족하고 넉넉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뒤에 정주의 삼현사(三賢祠)에 배향되었다.

백영수(白榮洙)

1811(순조 11) - ?
조선의 무관. 자는 경소(景韶), 호는 운초(雲樵), 도승지 인영(仁英)의 후손. 헌종 때 무과에 급제, 뒤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80이 넘도록 장수했다.

백은배(白殷培)

1820(순조 20) - ?
조선의 화가. 자는 게성(季成), 호는 임당(淋唐), 민환(敏煥)의 아들. 화원으로서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인물 산수(山水) 영모를 잘 그렸다.

백낙관(白樂寬)

1846(헌종 12) - 1883(고종 20)
조선의 유생, 자는 경교(景敎), 호는 추강(秋江). 병조참판 홍수(弘洙)의 아들. 1882년(고종 19) 일본 세력 침투에 반대, 척왜(斥倭)의 소(疏)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면서 성토하다가 투옥되었다.
이 때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난군에 의해 구출되었으나 군란이 실패하자 다시 체포되어 제주도에 귀양갔다.

백성흠(白性欽)

1843(헌종 9) - 1919
우국지사. 제주판관 기호(基虎)의 아들. 전남 장흥 출신. 일찍이 무과에 급제, 벼슬이 선전관에 이르렀으나 1910년(융희 4) 한일합방이 되자 향리에 은신, 1919년 고종이 죽자 통곡하다가 죽었다.

백낙귀(白洛龜)

? - 1907(융희 1)
조선의 항일운동가. 일명 낙구(樂九), 호는 운정(雲亭), 전남 광양출신,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광양 하동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사령장(司令長)이 되어 한때 순천을 점령하기가지 했으나 마침내 체포되어 강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사로 석방, 정읍 유병우(柳秉禹)의 집에 머물면서 재기를 기하여 의병을 모집하다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순국했다.

백낙연(白樂淵)

조선의 관리. 1871년(고종 8) 철산 부사로 재직 중 미국 상인 프레스턴 등이 제네럴 셔어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만행을 부리자 관찰사 박규수와 논의 끝에 셔어먼호를 불태웠다.
1881년(고종 18) 영선사 김윤식의 관변이 되어 군기제조를 연구할 유학생들을 이끌고 청나라에 다녀왔다.

백운한(白雲翰)

? - 1919
독립운동가. 평북 의주. 3 1운동 후 남만주에 들어가 독립단에 가담하고 이명서 김근하 함일 등과 국내에 들어와 홍주의 협력으로 독립단 국내지부를 설치하고 평양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 후 만주로 돌아가다가 관전현 상루구에서 체포되어 본국에 송환, 평양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백홍준(白鴻俊)

1748(헌종 14) - 1894(고종 31)
기독교 순교자(殉敎者) 호는 북산(北山), 의주(義州) 출신 일찌기 개화사상(開化思想)에 문떠, 1874年(고종 11) 친구들과 함께 만주(滿洲) 우장(牛莊)에 기서 영국 선교사 메킨타이어와 로스 두 목사(牧師)에게서 서구과학을 배우는 한편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1876年 이응찬(李應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등과 함께 메킨타이어 목사에게 한국인 최초로 세례(洗禮)를 받고 신교(新敎) 신자가 되었으며, 친구들과 함께 신약성경(新約聖經)의 한글 번역사업에 착수하여 1887年부터 고향 의주에 내왕하며 전도(傳道)를 시작, 1888년(고종 25) 서상륜(徐相崙), 최명오(崔明悟)와 함께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최초로 전도사가 되어 평안도 지방 일대에 교회 설립의 기반을 만들었으며 1889年 언더우드를 동반하여 만주에서 입국, 교인 33명을 선정하여 압록강(鴨綠江)에서 세례를 받게 했다. 1892年 만주에서 사서(邪書)를 간행했다는 죄로 체포, 옥사(獄死)하여 한국 신교사상 첫 순교자가 되었고, 뒤에 사위 김관근(金灌根)이 그의 사업을 계승하여 평안도 일대에 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백선행(白善行)

1862(철종 13) - 1935
여류 사회 사업가. 평양(平壤) 출신. 16세에 과부가 된 후, 근검절약(勤儉節約)으로 재산을 모아 1908年(융희 2)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大同郡古平面松山里)에 백선교(白善橋)를 놓았고, 1922年 평양에 공회당(公會堂)을 설립했으며 1923年 광성(光成) 소학교에 350석의 토지를 희사, 이듬해에는 창덕(彰德)소학교에 3백석 토지를 기부했다. 미국 선교사 모펫(馬布三悅)이 설립한 학교에도 부동산을 기증, 재단법인을 만들게하고 평양 숭현(崇賢)학교에 2만6천평의 토지를 희사했다. 1925年에는 전 재산을 기울여 가난한 사람과 사회 단체에 분재, 총독부에서 주는 표창을 거절하고 일평생 수절했다. 사회장(社會葬)을 지냈다.

백용성(白龍城)

1865(고종 2) - 1940 독립운동가, 33인의 한 사람, 불교인. 법명은 진종(震鍾), 속명은 상규(相奎), 용성은 법호(法號), 남현(南賢)의 아들. 전북 장수(長水)출신. 16세때 해인사(海印寺)에 입산, 수도를 한 후 전국의 사찰을 주유(周遊)하면서 심신을 연마했다.
1919년 정월.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만해 한용운선생이 귀국인사차 용성선사를 찾았다. 만해는 이 자리에서 스승 용성선사께 평양에서 온 남강 이승훈선생과 만날 것을 요청했다.
이때 남강선생은 오산학교를 설립하고 105인 사건으로 검거돼 4년간의 옥고를 치른후 가출옥으로 임시 몸이 풀린 상태였다.
아무리 개화된 세상이라 하더라도 기독교 목사와 선종불교의 선사가 만나기란 당시로는 유례가 없었던 것으로 이례적인 주선이었다.
그러나 용성선사는 이를 쾌히 승낙, 약속날짜를 정했고 곧 역사적인 대좌가 이뤄졌다.
이 만남은 후에 천도교의 손병희, 유도계의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순차적으로 만나 3·1운동이라는 민족의 대역사를 의논하는 계기가 된다.
용성선사의 항일운동은 이미 선대불교에 의해 창출됐던 호국불교와 또 선사에 의해 태동된 행동불교, 실천불교자로서의 진목면을 보여준 대장정이었다.
선사의 인생은 크게 두단계로 요약된다. 그 하나가 14세에 불도에 입문한후 평생을 불자로 살아왔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사실이다. 선사는 자신의 굳건한 종교관에 의해 초년, 중년에는 불교대중화운동을 펼쳤고 중년 이후 여생은 불교를 통한 항일운동에 진력했다.

◇ 1864년 장수군 번암면서 출생
백용성조사는 이 나라에 풍운이 감돌기 시작한 고종 1년(1864년) 5월 8일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백남현(白南賢)과 어머니 밀양손씨(密陽孫氏) 사이에 큰아들로 태어났다.
14세에 남원 산곡동 지리산 교룡산성 덕밀암에 출가하여 혜월화상(慧月和尙)으로부터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의 가르침을 받고 본격적인 불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후 16세(1879년)에 덕밀암 주지스님의 인도로 경남 가야산 해인사 극락암에 재출가하여 화월화상(華月和尙)을 은사로 혜조율사(慧造律師)를 계사로 사미십계를 수지 득도(得道)하였다.
선사는 임제종의 6대법손인 부휴(1543∼1615)와 종파의 법맥을 잇는데 혼신을 기울인 휴정(1520∼1604)이나 사명당 유정(1544∼1610)의 뒤를 이어 임제종의 법손으로 활동하기까지 불교대중화와 한국불교중흥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 시작한다.
1860년대부터 국내에 출입하기 시작한 일본인 승려들은 1900년대에 이르러 일본의 열연종을 선두로 진종·정토종·조동종·원종 등이 차례로 국내에 들어와 군국일본의 위세아래 각자 자기 종단의 포교활동을 벌였다.
특히 일본의 정토종은 우리의 통도사를 자기 종단의 말사(末寺)로 삼으려는 야심을 품었으며, 조동종과 원종은 우리나라 불교를 통째로 자기네 종단에 병합시키려는 야욕을 가지고 교활한 방법으로 국내 종단에 접근하기도 했다.
이른바 조일불교단합관할(朝日佛敎團合管轄)을 주창하며 민족종교를 말살하려 했던 것이다.
이때 조선총독부의 간섭을 받던 전통교단과는 별도로 새로운 불법교화를 통해 피압박민족의 정서를 순화하려는 교단이 출현했다. 다름아닌 용성선사가 이끄는 대각교의 창설이다.
1921년 용성선사는 서울 봉익동 3번지에 대각교포교당 간판을 걸었다. 당시 대각교의 출현은 조선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줬다.

◇ 불교대중화·선농일치 주창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는 배는 어디로 갔는고, 옛과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金烏千秋月 洛東萬里波 漁舟何處去 依舊宿蘆花)
1886년 8월, 진종 백용성조사가 그의 나이 23세로 신라불교의 초전법륜성지인 경북 도개동(桃開洞) 아도모례원(阿道毛禮院)에서 정진 끝에 지견(知見)이 열려 보리도를 증오(證悟)한후 낙동강을 건너면서 읊은 오도송(悟道頌)이다.
이 오도송은 훗날 백조사가 창설한 대각교의 종지구(宗旨句)가 돼 용성조사의 사상을 함축하는 「대각(大覺)」의 절구로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는 저서 수심론에서 『대각심인(大覺心印)을 허공에 찍은즉 모양이 전무하고 물위에 찍은즉 흔적은 있으나 모양을 볼수 없고 종이에 찍은즉 그대로 나타남이라. 너희들도 이와같이 제1구 제2구 제3구로써 널리 중생을 제도하라. 나의 대각성존이 이 법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셨기에 나의 교를 대각교라 한다』라고 밝히면서 대중교화를 한국불교의 나아갈 지표로 제시했다.
실제 용성조사는 불교가 대중속에 뛰어들어 행동하는 불교로 전환돼야 한다며 스스로 심산불교전통을 깨고 도시복판에 절을 짓고 포교를 강화코자 했다. 이러한 조사의 뜻은 당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으로 작용하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용성선사는 또 승려들도 스스로 농사를 짓고 노동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이른바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장했다.
용성조사는 이 선농일치사상을 펴면서 이를 직접 실천해보이기 위해 경남 함양군 백전면에 화과원(華菓院)을 설립했으며 만주 간도성에 연길농장(延吉農場)을 만들어 이의 확대에 힘썼다.

◇ 불경한글화·불교음악 현대화의 선구자
실천불교를 주창했던 용성선사는 저술활동과 불경의 번역사업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 우리나라 역대 승려 가운데 가장 많은 저서와 번역본을 남겼다.
특히 용성선사에 의해 실행된 경전의 한글번역은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으로 우리 근대 불교문화에 귀중한 획을 긋는 일대 장전이 아닐 수 없다. 1921년 용성선사는 대각사 안에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설립, 본격적인 불경번역사업을 펼쳤다. 불후의 명작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도 이때 저술된 것으로 전한다.
선사는 또 불교음악의 현대화에도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조사가 집필해 1927년에 간행된 「대각교의식」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찬불가인 「왕생가」를 비롯 「대각가」「권세가」등이 실려있다.
열반 58년만에 출범한 대각사상연구원(원장 한보광)에서는 이같은 발견을 중심으로 조사의 사상과 업적에 대한 재조명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그 시작으로 지난해 3월 대각사상학술발표회를 개최했다. 이 발표회에서는 「용성조사의 사상과 활동을 중심으로한 한국불교사의 재조명」에 관한 학계의 연구발표가 관심을 모았다.

성역화사업
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명인 백용성조사(祖師)의 생가지 성역화 사업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백조사유훈실현후원회(회장 한명옥)과 장수군은 지난해 백조사의 생가였던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 일대에 가칭 죽림정사를 창건하는 등 총 30억원 규모의 생가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했다.
성역화 사업 계획에 따르면 대웅전과 선방 등이 들어설 죽림정사는 1백70여평 규모로 건축될 예정이고 47평 규모의 백조사 생가가 복원되며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한 주차장, 정자, 기념품 판매장 등이 건립되는 등 모두 3천9백여평이 성역공간으로 오는 2천2년까지 개발된다.
이에 따라 백조사유훈회와 장수군은 지난해 죽림정사가 들어설 번암면 죽림리 일대에 대한 토지 및 지장물 매수를 마친 뒤 지난해 10월 29일 죽림정사 개토식을 갖는 등 본격적인 생가조성사업에 돌입했다.
백조사유훈회는 올해 2억원을 들여 죽림정사가 들어설 토지 구입을 완료하고 7억4천8백만원을 투입, 36평짜리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하는 등 백조사의 생가를 한국불교의 새로운 성지로 개발한다는 복안이다.
장수군도 지난해 동국대 사찰조경연구소에 용역을 의뢰, 백조사의 생가와 연계한 동화댐관광권 개발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군은 죽림정사와 연계해 독립운동 기념관지구, 선농교육 공원지구 등을 단계별로 개발한 뒤 논개생가지와 장안산 등을 연결하는 문화관광 코스로 개발할 계획이다.

불교성지로 발전하길

『한국 불교계의 거목인 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 백용성조사의 생가지가 성역화돼 기쁩니다』
지난해부터 죽림정사창건을 위해 장수를 수시로 방문하고 있는 대각사 주지 겸 조실 임도문스님은『장수지역민의 높은 관심 덕분에 죽림정사창건 등 생가지성역화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고『우리나라 불교역사와 뗄 수 없는 조사의 발자취를 뒤늦게나마 성역화할 수 있다는 감격에 서울과 장수를 수십번 오고가도 전혀 힘든줄을 모르겠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석가여래부촉법 제70세로 백조사의 법손이기도한 불심도문 스님은 현재 부처 탄생성지인 네팔 룸비니원에 한국사원을 건립중이다.
또 인도 부다가야 보리수원과 바라나시 녹야원, 사위성 기수급 고독원, 부처가 열반한 구시나가르 사라쌍수원 등 성지를 백조사 유훈대로 보존하기 위해 세계불교성지보존회를 창설 회장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불심 도문스님은『백조사 생가지에 건립될 죽림정사는 백조사선양사업을 이끌고 있는 유훈실현후원회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장수군민의 합작품』이라며『백조사 탄생지인 장수가 인류평화를 기원하는 새로운 불교성지로 발전하길 바란다』고 합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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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범(白義範)

? - 1920
독립운동가. 일명 범장(範長), 평북 의주 출신. 한일합방 후 조병준의 제자가 되어 남만주로 망명, 관전현에서 대한독립단에 가입, 독립단 특파원 광복군 교통사장을 역임했다.
1920년 국내에 들어와 의주군 광상면에서 활동하다가 일본의 밀정 김동휘의 밀고로 경찰의 습격을 받아 전투 끝에 전사했다.

백운각(白雲閣)

? - 1929
독립운동가. 본명은 승욱(昇煜). 평북 정주 출신. 3 1운동 때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선창하며 민중을 지휘했고, 후에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9년 조선혁명군에 가입, 소대장으로 활약중 이 해 유하현 추가가에서 반독립군파 및 토군의 공격을 제압코자 소대원 11명을 인솔, 출동했으나 매복하고 있던 5백여 명의 적에게 포위, 3일간이나 싸우면서 많은 적을 죽였으나 식량과 탄약의 고갈로 전원이 전사했다.

백인선(白仁善)

1879(고종 16) - 1921
독립운동가. 황해도 장연 출신. 1919년 만조로 망명, 독립단에 가입하고, 이듬해 이영선 서춘보와 함께 국내에 특파되어 무력항쟁을 전개하다가 황해도 송화군 봉방면에서 일본 경찰 수색대에게 포위되어 교전 끝에 전사했다.

백기준(白基俊)

1887(고종 24)∼? 독립운동가.
호는 운계(雲溪). 평안북도 위주출신. 선문(善文)의 아들이다.
1905년 서울 보성전문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하던 중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병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일제의 기밀을 탐지하기 위하여 경찰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일이 여의치 못하자 3개월 만에 자진사퇴하였다.
이에 일본경찰로부터 요시찰인으로 주목을 받게 되자 1919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해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 평안북도 독판부와 독립단 총본부로부터 백의범(白義範)·김승학(金承學) 등과 함께 국내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연통제와 독립단 지부를 평안북도지역에 조직,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동지 백의범과 같이 용천·의주 등지를 주로 내왕하면서 활동하였고, 김승학은 평안남도·황해도일대에서 활동한 결과 80여개소의 지부를 설치하고 청년들을 포섭, 독립운동대열에 동참하게 하였으며 거액의 군자금을 모아 독립단 본부로 돌아가 나누어주고 임시정부에도 송금하였다.
1920년 만주에서 결성된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총무부장에 취임하고,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진력하여 광복군참의부(光復軍參議部)가 조직되자 그 참사(參事)에 취임하였다.
남·북만주의 독립운동기관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직할로 광복군사령부가 수립되자 그 재무사장(財務司長)에 선임되었다가 상해로 돌아와 1921년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입법활동을 전개하였고, 재정난으로 발간이 중단되고 있던 《독립신문 獨立新聞》을 김승학과 함께 운영자금을 준비하여 속간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 국무원비서장대리에 선임되었으며, 1923년 10월 24일 교민단(僑民團)제4회의원총선거에서 본구의원(本區議員)으로 당선되었다.1924년 전각료가 경질되매 사임, 내몽고 바오터우(包頭)로 가서 의민부(義民府)를 조직하고 그 총무부장이 되었다.그러나 곧 원래 재임하던 각료가 다시 집무하게 되자 그들을 따라 상해로 와서 국무원비서에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 임시정부 국무원비서국장으로 승진하였고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조직에 참여하고 기관지 《한보 韓報》를 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2년 이후 산둥성(山東省) 칭다오(靑島)로 가서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백일규(白一圭)

1879(고종 16) - ?
독립운동가. 평남 강서(江西) 출신. 호는 약산. 1905年 하와이에 이민(移民), 이듬해 미국 본토에 가서 공부하다가 1907年(융희 1)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창립 발기인이 되고, 이어 친일적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살해한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 두 의사(義士)의 후원회 회장이 되어 공정한 재판을 위해 힘썼다. 1909年 네브라스카에서 박용만(朴容萬)등과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 1918年 캘리포니아대학 경제과를 졸업. 이어 북미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한민보] 주필이 되었다. 1919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자금 30만 달러를 모아 상해(上海) 임시정부에 보냈으며, 1926年 북미 태평양 한인국민회 총회장에 선출되었고, 1946年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국민보(國民報)] 주필이 되어 주로 언론을 통한 한국인의 권익 보호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고, 뒤에 미국 본토로 돌아가 국민회 중앙 감찰위원을 지냈다.

백종렬(白鍾烈)

? -1938
독립운동가. 자는 현복(賢復), 호는 온당(溫堂). 평북 태천 출신.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때 유인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전개,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에 망명하여 관전현 환인현 등지에서 농무계 향약계를 조직, 의병 양성에 진력했다.
3 1운동 후에는 조맹선 등과 대한독립단을 조직, 부총재가 되어 많은 활약을 했다. 그 후 일본 군대가 관전현 향로구에 있는 한국 청년단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 대책을 강구하러 청산구에 갔다가 피체, 환인현에서 총살당했다.

백영촌(白永村)

1882(고종 19)∼?. 한말의 의병장.
별명은 남신(南信)·영근(永根). 경상북도 영일출신.상목(相穆)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만년(崔晩年)이다.
1906년 3월 정환직(鄭煥直)의 명으로 정용기(鄭鏞基)가 영천에서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己)·손영각(孫永珏) 등과 의병을 일으켜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구성하였을 때 그 휘하에 들어가 우포장(右砲將)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계획이 실행되기에 앞서 의병장 정용기가 관군에 붙잡히자 청하와 경주 등지를 공격하는 등 소극적인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렇지만 181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에야 비로소 관계에 진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문한(文翰)이 흡족하고 넉넉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뒤에 정주의 삼현사(三賢祠)에 배향되었다.

백일진(白日鎭)

1883(고종 20) - 1921
교육자,독립운동가. 기독교 전도사(傳道師)로서 1904年(광무 8) 전도사 김관근(金灌根)과 함께 의주(義州)에 양실학교 (養實學校)를 설립했고, 1908년(융희 2) 의주 군내 사립학교 연합 대운동회에서 일본의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1910年 선천(宣川)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교사가 되고, 이듬해 105인 사건으로 체포, 5년형을 선고받았다. 뒤에 석방되어 1919年 김병조(金秉祚)등과 중국 안동(安東)에서 임시의사회(臨時議事會)를 조직, 청년단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21年 피체, 뒤에 병보석(病保釋)되어 병사했다. 1963년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백낙준(白樂俊)

1884(고종 24) - 1934
국악사(國樂師). 충남 논산(論山)출신. 가야금 산조(散調)의 장단(長短)을 취합(取合), 선택(選擇)하여 거문고 산조(散調)를 작곡함으로써 우리나라 거문고 산조의 효시를 이루었다.

백남준(白南俊)

1885(고종 25) - ?
독립운동가. 일명 신일(信一), 우광(愚狂). 평북 초산(楚山)출신. 일찌기 만주 길림성(吉林城)에 이주, 정미업에 종사하던 중 1911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5면형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후에 미국 유학을 뜻했으나 여비 관계로 단념, 1919年 만주 유하현 삼원보(滿洲柳河縣三源堡)에서 현익철(玄益哲), 김규환(金奎煥)등과 한인공회(韓人共會)를 조직, 이해 군정서(軍政署)와 통합하여 참모로 있다가 간부들의 분열로 탈퇴했다. 1920年 오동진(吳東振)의 권유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가입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했고, 1922年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공산당 동양민족 대회에 참석, 이해 가을 광복군 총영의 대표로 통의부(統義府) 조직에 참가했다. 이어 10월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통의부 대표로 각 단체와 연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는에 힘썼다. 그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했다.

백광운(白狂雲)

? - 1924
독립운동가. 본명은 채찬(蔡燦). 충주(忠州)출신. 1905年(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을 따라 일본군과 싸웠다.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하여 통화현(通化縣)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 합니하(哈泥河) 산골에 백서농장(白西農場)을 만들고 둔전제(屯田制)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年 3 1운동 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들어가 모험대를 조직, 군내의 일본기관 파괴 활동을 전개했고, 이듬해 군정서 본부가 길림성(吉林省) 방면으로 옮겨지자 동지 신용관(辛容寬)과 의용군을 조직, 평북 강계(江界)에 잠입하여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했다. 1921年 관전현(寬甸縣)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1923年 남만주의 군인 독립단체인 통의부(統義府)에 가입, 제1중대장이 되었으나 내분으로 제 2, 3, 5 중대장과 함께 탈퇴하고 상해 임시정부 직할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결성, 참의장이 되었다. 그 뒤 압록강 철교 준공식 때 총독 사이또오(齊藤實)를 습격하는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다가 통의부의 백병준(白炳俊), 백세우(白世雨)에 의해 살해되었다. 1962年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백남채(白南採)

1888(고종 25) - 1950
독립운동가. 경북 경산(慶山) 출신. 1910年 중국 북경대학(北京大學)에 유학 중 이시영(李始榮)등과 접촉하며 독립운동에 종사, 졸업후 귀국하여 1918年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교감 및 이사장이 되었다. 3 1운동 때 대구 남산교회(南山敎會) 장로로서 서병우(徐丙佑), 홍주일(洪宙一), 이만집(李萬集), 김마리아 등과 만나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다가 시위 전날인 3월 7일 일본 경찰에 피체, 2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에도 남산교회 장로로 배일사상 고취에 진력했으며, 해방 후 미군정 경북 내무부장, 입법의원을 거쳐 제헌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백남운(白南雲)

동암(東岩) 백남운(白南雲)선생(1894∼1979)은 좌파경제학의 대부로, 학자이자 교육자이며 정치가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芹村 白寬洙선생과는 일가로 조선 선조시대에 의정부 우참찬 벼슬을 지낸 文敬公 白仁傑선생(사후 좌찬성에 추대, 청백리)의 같은 후손이다.근촌선생이 5살위로 항렬로 따져 할아버지뻘이 된다.동암선생이 동경상과대학 유학시 백남선이라는 일가에 보낸 편지에 할아버지 근촌의 안부를 묻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두사람은 상당히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두사람의 고향은 고창군 성내면으로 우리나라 근현대사 논의에서 빼놓을수 없는 거목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근촌선생은 상당히 알려진데 비해 동암선생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동암선생이 남긴 족적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너무 많은 부분이다.
여기에는 근촌선생이 6.25 당시 납북돼 선생에 대한 연구와 논의를 활발히 할수 있었던 반면 동암선생은 자진 월북해 90년대초 해금 이전까지만 해도 선생에 대한 논의자체가 금기시 되었던 배경이 내포돼 있다.그래서 선생에 대한 기본적 자료와 학문적 연구논문, 서적등이 극소수에 불과해 아쉬움을 남겨주고 있다.
동암선생은 동학혁명이 일어난 해인 1894년 2월11일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에서 한학자였던 遂堂 白樂奎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어릴적 아버지를 따라 성내면 부덕리 엄동(일명 엄골)으로 이사와 이곳에서 성장해 성내면이 고향으로 불리워진다.
동암선생의 집안은 봉건 양반집안이었지만 외가에 종종 의존할 정도로 매우 빈한했던 집안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선생은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朱子家禮와 한학을 깊이있게 배워 훗날 신학문을 연구하는 큰 토대를 쌓았다. 선생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한국사회경제사를 체계화한 불후의 역작 ‘조선사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집필하기 위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원전을 3번씩이나 읽고 연구를 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종친들에 의하면 선생은 어릴때 고집이 세고 내성적이라 한번 돌멩이를 차기 시작하면 중간에 도랑에 빠지더라도 다시 건져내 끝까지 집으로 굴려왔을 만큼 고집이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선생이 학자로서 대성할수 있던 것도 이런 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생은 1911년 18살의 나이로 奇南燮씨와 결혼해 생전에 장남 두기와 장녀 현기,차녀 금기,차남 홍기,삼남 영기씨등 3남2녀를 자녀로 두었으나 금기씨와 홍기씨만 살고 나머지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모두 사망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봉건적인 집안이었으나 부친으로부터 排日의식을 체득한 선생은 신학문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1912년 19살의 나이로 당시 최고 관립학부인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했다.

새로운 세계와 신학문을 접한 선생은 이곳에서 근대과학적 정신과 지식,자본주의 경제학,농학의 기본이론을 습득했다.선생의 성격도 외고집에서 道義를 원칙으로 삼고 활달하면서도 온화한 품성으로 변화해 갔다.훗날 선생의 주변에 수많은 소장학자와 학생들이 뛰따랐던 것도 이런 품성에서 비롯된다.학문 못지않게 덕성을 길렀던 것이다.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몇년간 강화간이농림학교겸 강화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강화산립조합에서 技手로 재직했다. 이 기간동안 일제하의 한국농업의 기본문제와 민족현실에 눈을 떴다. 앞으로의 학문연구와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자기앞에 놓여진 가슴아픈 민족의 현실을 더욱 깊이있게 연구하고자 선생은 직장을 그만두고 1918년 10월 25살의 늦은 나이로 일본 유학길에 나섰다.
일본 사회주의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당시 종합잡지 ‘개조’를 창간한 일본인 야마모토 자네히코집에서 잠시 머물며 동경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할 준비를 한 선생은 다음해에 관비유학생으로 이 학교에 입학했다.선생은 이 학교을 거쳐 일본 최고학부로 알려진 동경상과대학을 1925년 3월에 졸업했다.
선생은 1923년 학교재학중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 하숙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기와가 무너져 내리는데도 집안으로 다시 들어가 귀중한 책 몇권을 들고 나왔을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학문적인 욕구가 치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선생은 이 시기에 사상적 토대와 앞으로 펼칠 학문세계의 골격을 형성했다.암울한 민족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문상의 주체성이 절실함을 자각했다. 나아가 ‘조선사회경제사’를 체계화시키고 한국인이 주체가 되는 ‘조선연구’의 진흥을 필생의 연구과제와 실천과제로 설정했다.
선생은 일제하의 민족적 모순과 지주제중심의 당시 사회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학문적 연구에 막스주의를 자연스럽게 도입했다. 하지만 극단적인 계급주의를 반대하고 강렬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막스주의를 수용했다. 민족해방이 전제되지 않는한 사회해방은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했던 선생은 평생 좌우세력의 협동을 소신으로 주장했다. 이같은 사상적 영향은 당시 동경고와 상대에 퍼져있던 일부 사회주의적 학문 분위기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여진다. 동경상대에 널리 퍼져있던 학풍 즉 자본주의학문이 한국침략과 강점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때 ‘자본론’과 ’국부론’등 외국서적의 원전을 공부하면서 영어와 불어,러시아어,독어를 배워 5개국어에 능통했다고 전해진다.
이같은 사상적 토대와 학문세계의 골격을 갖춘 선생은 동경상대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연희전문 상과교수로 부임했다.선생의 나이 32살때였다.
1938년 연희전문을 그만두기전까지 이 학교에서 막스의 유물사관과 계급투쟁론에 서서 조선역사를 강의하는 한편 한국사회경제사를 국내 처음으로 체계화시킨 역저 ‘조선사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1933년과1937년에 각각 출판했다.이 두권의 저서는 경제학도라면 책꽃이에 거의 꽃아놓고 볼정도로 필독서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1936년에 중앙 아카데미(학술원) 창립을 제안하기도 했던 선생은 연전경제연구회 사건을 기화로 오랫동안 후학들을 가르켰던 연전을 그만두고 칩거에 들어갔다.하지만 이것도 잠시, 8.15해방은 선생을 해방공간으로 불러내 격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었다.격랑의 이 해방공간속에서 선생은 경제학자로서의 길을 잠시 접어두고 정치가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게 된다. 다른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새국가건설’이라는 역사의 명제앞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이 때는 좌.우익의 주도권다툼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이 저서는 사적유물론의 원리를 조선경제사에 처음으로 적용한 역작으로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 ‘丁茶山의 사상’과 ‘조선민족의 진로’등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하지만 선생은 1938년 학생동아리 ‘연전경제연구회’ 사건과 관련해 학내 적화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검거돼 투옥되는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선생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백남운교수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세대 방기중교수는 이 논문에서 한국 막스주의 역사학과 사회과학을 개척했다고 평가했다.

 

한국사를 세계사적 시야에서 법칙적으로 인식할수 있는 단서를 마련하는 한편 역사인식과 민족해방, 해방이후의 신국가건설의 과제를 상호유기적으로 파악할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는 것. 또 일제 식민사학자의 한국사왜곡을 실증적으로 타파해 우리나라 사회경제사 연구의 방향을 제시한 것은 물론 한국사인식의 典型을 확립하고 민족문제의 중요성을 역사연구를 통해 구체화함으로써 정체론적 입장의 교조적 막스주의 한국사 인식을 거부했다고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평가했다.

 

만 51세가 된 선생은 해방후 다음날 조선학술원을 창설해 위원장을 맡고 지금의 서울대학인 경성대학 법문학부 경제학교수로 부임했다. 조선학술원 창설에 참여한 인사는 물리화학의 김양하선생과 이론경제학의 윤행중선생,철학의 김계숙선생등 중견지식인들로 이들은 ‘새국가건설’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을 제공했다. 학술원은 해방공간에서 좌.우통합에 중요한 구실을 한 단체로 1946년 2월15일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일명 민전으로 불림)에 참여해 이론을 제공했다.선생은 좌익의 민전 공동의장에도 선출되는등 해방공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서울대 전 최호진교수가 “백남운선생은 일제시대부터 학문적 능력과 도덕적 품성으로 학계의 거목으로 꼽혔다”고 회고하는 바와 같이 많은 학자들을 결집할만큼 존경과 권위를 한몸에 받고 있었던 것이다.

모스크바의정서가 규정한 신탁통치조항에 불만을 가졌으나 통일정부가 들어서면 민족자주적으로 해결되리라 믿었던 선생은 비밀리에 월북해 북한의 조선독립동맹 김두봉위원장을 비롯한 간부들을 만났다. 서울로 돌아온 선생은 조선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선생은 이어 북한의 조선독립동맹이 신민당을 발족시킴에 따라 남조선신민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선생은 완전한 민족해방을 성취하려면 사회의 혁명세력이 연합성을 띠어야 한다는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을 제기했다. 이같은 선생의 주장은 좌우익의 민족통일전선수립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이라는 점에서 중도파지식인들의 호응을 얻었으나 과격성과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이론적 비판을 받았다. 조선공산당은 일부 유산자와의 동맹을 배척했던 것이다.
이 당시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북조선공산당과 김두봉의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로동당을 발족시키고 남한에는 좌익3당인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선생의 남조선신민당이 존재하고 있었다.북로당은 남한의 좌익 3당으로 하여금 통합신당 곧 남로당을 만들것을 요구했다.
이같은 권력의 암투과정에서 선생은 남조선신민당 위원장자리를 빼앗기고 여운형과 함께 사회노동당을 창당하고 박헌영이 지도하던 남로당의 10월폭동에 반대했으나 힘이 모자라 막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북한으로부터 우익기회주의자로 매도당했던 선생은 사회노동당을 해체해야만 했다. 이후 선생은 남로당에 비해 훨씬 덜 과격한 좌파적 근로인민당을 창당, 부위원장에 올랐으나 여운형이 암살돼 당을 힘겹게 이끌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48년 5월10일 남한총선을 앞두고 갈등을 겪던 선생은 총선을 비난하면서 자진 월북해 같은해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이후 그대로 북한에 눌러 앉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월북했던 인사들이 거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나 선생은 운좋게도 살아남아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걸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한때 우익기회주의자와 분열주의자로 몰렸던 선생이고 보면 매우 예외적이다.
선생은 1948년 9월9일 출범한 북한정권의 초대내각에서 교육상에 발탁돼 8년동안 재직하고 과학원 원장도 겸했다.1961년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뽑히고 67년에는 73세로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선출돼 5년동안 자리를 지켰다.이후 막스레닌주의방송대학 총장과 조국전선의 의장을 지내기도 했던 선생은 79년 만8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어록
◆ 일제에 의해 왜곡된 조선의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이 작업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절실한 체험자인 조선인이 해야한다(1930.1월 논설)
◆ 연합국에 의한 신탁통치 실시란 뜻밖의 일로 한국에 대한 연합국의 인식이 충분하지 못한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제적으로 한국의 독립없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기하기 어려우며 국내적으로도 한민족은 자주독립할수 있는 역량과 조건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3천만이 굳게 뭉치기만 하면 탁치문제는 극복할수 있다. 좌우익의 각 정당이 엄숙한 태도로 자기비판하여 지엽적 문제에 구애됨이 없이 대국을 달관하여 시급히 제휴해서 민족통일전선을 하루빨리 결성하는 것이 모든 문제해결의 선결조건이 될 것이다.(1945년 12월29일 논평)
◆오늘날 좌익과 우익이 벌이고 있는 대립은 역사적으로 요구되는 연합성을 파괴하고 있는 점에서 정당한 대립은 아니며 민중에게 불안을 줄 뿐이다.(1946년 저서 ‘조선민족의 진로’중)
◆입장과 노선이 다르다고 해도 상대방에 대한 저열한 비방은 삼가는 것이 정치의 대도다.(1946년 민전에 참여하면서)

백관수(白寬洙)

1889(고종 26) - ?.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근촌(芹村), 도진(道鎭)의 아들. 전북 고창(高敞) 출신.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 반만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실로 세계 최고 민족의 하나이다. 조선은 항상 우리 민족의 조선이요, 한번도 통일한 국가를 잃고 이민족(異民族)의 실질적 지배를 받았던 일은 없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에 우리 민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얻기를 요구하며 만일 불연이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이로써 독립을 기필코 이룰 것을 선언하노라”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일본 동경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 대강당에는 조선인 유학생들이 발디딜 틈없이 모여 들었다.사회자의 소개로 등단한 조선청년독립단장 백관수(白寬洙)는 차분한 음성으로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 순간 일본경찰의 저지와 이를 가로막는 학생들과의 격투가 벌어졌고 삽시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래도 백관수의 낭독은 계속 되었고 이어 김도연(金度演)의 결의문 낭독, 사회자 윤창석의 기도로 끝이 났다.
이날의 선언이 바로 역사적인 「2·8선언」으로 20일 뒤 조선을 뒤흔든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날 독립선언서에는 백관수를 비롯 최팔용 김도연 김철수 윤창석 김상덕 서춘 최근우 이종근 송계백 이광수 등 11명이 서명했다. 당시 동경에 없었던 이광수와 최근우를 제외한 9명의 대표는 현장에서 일경에 연행 되었다. 이로 인해 백관수는 1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와 함께 한국 근대사에 큰 맥을 이룬 근촌(芹村) 백관수는 1889년(고종 26) 고창군 성내면 생근리에서 태어났다. 선조때의 명신이자 이름난 선비였던 백인걸(白仁傑)의 10대손으로 아버지는 도진(道鎭),어머니는 고씨(高氏)였다.

그는 5살부터 호남의 거유인 간재 전우(田愚) 문하에서 한문을 익혔다. 하지만 당시는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민비 시해사건이 터지는등 국내외 정세가 뒤숭숭하던 때였다. 그가 15살되던 해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에는 망국의 을사조약이 체결 되었다. 이 무렵 백관수는 평생의 동지 김성수와 함께 신학문의 스승인 한승이(韓承履)를 만나게 되어 2년에 걸쳐 군산 금호학교에서 물리 수학 영어 등을 배웠다.
이에 앞서 그는 김성수를 통해 송진우를 만나게 된다. 송진우는 김성수를 집으로 찾아갔다 김성수가 백관수와 더불어 변산 내소사 청연암으로 공부하러 갔다는 말을 듣고 같이 입산했던 것이다. 송진우와 김성수는 담양의 창평학숙에서 만나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때 의기가 투합, 입지(立志)를 세운 세소년은 나중에 까지 서로 협력하며 같은 길을 걷게 된다.
금호학교를 졸업한뒤 김성수와 송진우는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나고 백관수는 부모의 뜻에 따라 서울로 올라가 경성법률전수학교에 들어갔다. 1915년 학교를 마치고 바로 YMCA에 들어간 백관수는 민족지도자인 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으로 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애국계몽운동과 사회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적극적인 YMCA 활동 덕분에 백관수는 1917년 일본에 유학할 기회를 가졌다. 비록 28살의 만학이긴 하나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明治) 대학 법과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경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인 학우회에 가입, 주도적인 활동을 벌였다.
때마침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918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자 국내외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독립운동이 힘을 얻게 되었다. 장덕수가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의 밀명을 띠고 입국하고 이승만의 밀사가 서울을 다녀 가는등 자못 움직임이 활기를 띠었다.
동경에 유학중이던 백관수도 송계백을 송진우에게 보내 독립선언서 내용을 전달했다. 이 선언서는 백관수가 기초하고 춘원 이광수가 손을 본 명문으로 꼽힌다. 동경에서는 이 선언서를 인쇄할 곳이 없으니 활자만 구해 보내주면 국내와 시기를 맞춰 동시에 거사하자는 뜻에서 였다. 그러나 송계백이 상처를 입으면서 까지 짊어지고 온 활자는 일경의 감시 때문에 인쇄시설을 확보하지 못해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독립선언서는 프린트에 의존해 찍어야 했다. 유학생 10여명이 백관수의 하숙집에 모여 1주일 동안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 1만부를 찍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2·8 선언이 탄생한 것이다.
1920년 3월 출옥한 백관수는 중단했던 학업을 1921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후 기독교청년회의 일을 보는 한편 언론계에 투신, 1924년 조선일보사 취체역(取締役)을 맡았으며 1926년 12월부터는 편집인과 영업국장을 겸임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손문(孫文)이 사망하는가 하면 조선공산당이 처음으로 조직되는등 국내외 정세가 혼미했다. 이에 자극받은 백관수는 민족주의자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김준연 안재홍 백남훈 홍명희 최두선 등과 함께 1925년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결성했다. 그 뒤에도 그는 공산주의가 국내에 뿌리박지 못하도록 연정회와 태평양문제연구회를 단일화하는등 민족진영의 단합을 시도했다.
1927년 2월에는 민족 단일조직으로 신간회가 출범하자 이에 가담했으며 7월에는 하와이에서 열린 제2회 태평양회의에 유억겸 김활란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했다.
1928년에는 조선일보 사설 ‘보석(保釋)지연의 희생’이 문제가 되어 주필 안재홍과 함께 구속되고 이로 인해 조선일보는 1년4개월간 신문발행이 중단되었다. 1932년에는 홍문사(弘文社)를 설립, 월간지 동방평론을 발간했으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3년만에 폐간을 당하였다.
1937년 5월 그는 동아일보 제 7대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아 9개월만에 막 해제 복간된 상태였다. 그는 발행인과 편집인에다 편집국장까지 맡아 일제의 집요한 언론탄압에 맞서야 했다. 일제의 한글교육 폐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전쟁 강요 등이 그것이었다. 이같은 탄압에 굴하지 않자 일제는 동아일보를 강제로 폐간했다. 그는 이에 저항하여 끝내 폐간계를 날인하지 않아 1개월간 구금되는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로부터 해방되던 해까지 5년동안 낙향, 시작(詩作)과 붓글씨를 벗하며 침묵의 나날을 보냈다.
해방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는 상경, 조국의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정국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구성되는등 어수선했다. 좌우익의 이니셔티브 다툼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는 김병로 등과 함께 좌우익의 타협을 모색했으나 좌초되고 원세훈 조병옥 이인 나용균등 민족진영으로 조선민족당을 발기했다. 이 발기회가 바로 한국민주당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는 한때 한민당 총무를 맡기도 했다. 1946년 미군정하에서 남조선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을 지냈다.
1948년 5월 10일에는 고향인 고창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초대 법사위원장및 헌법기초위원으로서 헌법제정및 정부수립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50년 서상일과 함께 첫번째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발의했으나 2표차로 부결되고 말았다.
그로 부터 석달후 발발한 6·25 사변은 그에게 돌이킬수 없는 비극을 안겨 주었다. 서울 원남동 자택에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공산군에 의해 강제 납북되고 만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61세였다.

백정기(白貞基)

1896(건양 1) - 1936, 독립운동가. 전북 정읍(井邑)출신.
우리 민족은 수천년 역사를 통하여 우리를 침략해오는 주변 민족에 대하여 피로써 항쟁하면서 민족 존영의 명맥을 수호해왔다. 그 중에서도 최근세에 있었던 일제의 침략행위는 그 규모와 성격이 가장 크고 잔혹한 것이었을 뿐더러 마침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강토를 짓밟고 수많은 생명을 살륙하고 재산을 약탈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독립투쟁도 심각하고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불행하게도 한 때 그 같이 치욕의 역사를 면치 못했다 할지라도 그 반면 민족의 혼이 죽지 않았고 불굴의 항쟁력으로 민족 전체가 독립운동에 참여했기에 민족의 위대함이 있다. 이것이 민족정신의 기반이요, 민족사의 전통이다. 건양(建陽) 원년인 1896년, 을미사변(乙未事變)에 분개하여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고종(高宗)이 비(妃)인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경복궁을 피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임시 옮겨 거처했던 그 시기 이 지역 독립운동가 구파(歐波) 백정기(白貞基)의사가 출생했다. 백정기의사는 부안군 남하면 내진리 백사순(白士順)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7살때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해서 정읍이 고향처럼 됐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을 업으로 살아나온 백의사는 편모 슬하에서 많은 고생을 하며 자란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남달리 머리가 명석하고 똑똑한 소년으로 주위의 촉망을 한몸에 받아왔다고 도 기록에 남아 있다. 강인하였으며 남을 위하는 일을 잘 하였고 어른들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었으며 남달리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은 그의 나이 11살때 소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잃는 통한의 아픔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그 무렵 전국을 휩쓸고 유행하고 있던 ‘오적배들이 오조약을 만들어 삼천리 강토를 왜놈들에게 팔아먹고 있다’는 동요를 부르며 그는 이미 이때부터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울분을 터뜨리기시작하였다.
활발한 성격에 미소년의 용모를 지닌 의사는 13살 되던 해 명문과 부호로서 이 고을 일대에 이름을 떨치던 창녕(昌寧) 조(曺)씨 문중의 규수 팔락여인(1966년 작고)과 혼인하게 된다. 부호인 처가쪽에서 빈한한 가세인 의사를 위해 5백여석이라는 재산을 주었으나 의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이같은 당돌하고도 늠름한 기품에서 장차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인간적 넓은 도량과 소양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 이와같은 사내로서의 분별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장래를 말해주는 증좌이기도 하다. 특히 이 때부터는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노골화하여 이 고을의 부자였던 의사의 처가는 왜놈들의 수탈정책의 과녁이 되었으며 이 광경을 눈으로 본 의사였기에 그후 항일투쟁의 정신적 무장을 공고히 다지는데 큰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주경야독으로 사서(四書)에 통달하였고 다시 신학문을 배워 정치에 대한 식견도 높아 고향에서 일이 있을 때면 그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등 비범한 청년 백정기는 점진적으로 항일투쟁의 골격을 키워나갔다. 그는 적진을 뚫기 위해서는 먼저 적을 철저히 알아야한다는 병법을 새기며 일본어를 익히는 등 일본을 궤멸하기 위한 단계를 한발 한발 이행해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1919년 2월 서울에 올라가 3·1운동을 목격한 것이 의사의 행동력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그는 급히 고향에 돌아가 동지들을 규합해 무력항쟁에 나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평화적인 운동을 일제가 무력으로 탄압과 살륙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의사는 동지들과 함께 우리가 피를 흘려서 독립을 쟁취하는 길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같은 애국적 장지를 안고 고향을 등지게 되는데 이때부터가 이른바 의사 백정기의 찬연한 투쟁시절로 접어드는 본격적인 항쟁사를 기록한다.
그해 8월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 파괴에 나선 것. 이을규(건국 초대감찰위원) 이정규(전 성균관대 총장) 등과 함께 경인(京仁)간의 일본인 기관을 습격하려 한 이 사건은 비록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나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큰 사건이었다. 만주(滿洲) 펑톈(奉天)으로 망명, 홍범도부대에서 활동했던 의사는 이듬해 겨울 다시 국내로 들어와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펴다가 일시적으로 경찰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민함을 발휘, 임기응변으로 광부 행세를 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24년 일본에 밀입국한 의사는 동경에서의 대대적인 파괴공작을 꾀한다. 이때 일본 천황(天皇)의 암살기도에 참여하지만 이 거사 역시 실패에 돌아감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上海)로 재차 망명하게 된다.
이 천황 암살기도에는 몇 가지 후일담이 전해진다. 이 일을 계획할 때 의사의 용모에 매혹된 모리(森)라는 묘령의 일본여인이 모든 정보를 의사에게 제공했으며 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 의사가 체포 직전의 비운에 빠지게 됐을 때 그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일본을 빠져나왔다는 일화도 그 중 하나.
상해로 건너간 의사는 세계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게 되며 한때 농민운동에도 투신한다. 특히 이 무정부주의자연맹은 일종의 파괴성 국제조직으로서 의사가 이 조직에 가입하게 된 것은 일제 타도의 근본 목적이 그들의 붕괴에 있고 그 붕괴는 철저한 일제의 파괴밖에 없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결국 수많은 항거를 전부 행동화함으로써 독립투쟁의 최선봉에 서게 된다.
의사가 1928년 중국(中國) 남경(南京)에서 열린 동방 무정부주의자연맹 회의에 조선(朝鮮)대표로 참석한 것도 세계 무정부주의자연맹이라는 국제조직을 통해 일제에 의해 자행된 조선 침략의 마수를 제거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연장으로서의 참여인 것이다.
1930년부터 상해에서 남화(南華)한인청년연맹의 주요인물로 활동 중 1932년 청년연맹 예하의 결사대로 BTP라는 흑색 공포단을 만들어 만주 중국 등지에서 일본 기관들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한다. 이 무렵 의사가 벌인 거사로는 여순(旅順)에서 일본 수송선 1만5천t급의 폭파를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당시 해외신문에서도 대서특필되리만큼 큰 사건이었고, 다른 여러 곳의 폭탄의거와 함께 일본 관민에 준 위협은 적지 않았다. 의사는 다시 1933년 이강훈(李江勳) 이원훈(李元勳) 등 동지들과 함께 홍까우(虹口)공원에서 주중(駐中) 일본대사 유기찌(有吉明)와 일본 대사관원 그리고 친일 중국인사 등에 대한 대대적인 암살계획에 참여하게 되는데 불행히도 이 계획의 사전누설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의사는 이 거사를 마지막으로 일본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돼 일본 나가사끼(長崎)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일본의 법정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중 1936년 5월 22일 41세를 일기로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1946년 6월 8·15해방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된 동지 이강훈의사가 적극적으로 나서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두 의사의 유해와 함께 일본에서 봉환, 서울 효창공원 안에 안정돼 ‘3의사 묘’로 불리운다. 1963년 백의사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실로 짧은 의사의 일생이었지만 그의 생애는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한 일제의 타도 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었던 애국적 장지로 일관하였던 일생이기도 하였다. 우리를 빼앗고 우리를 죽이는 적에게는 투쟁을 통한 철저한 응징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의사의 애국정신이었고 독립투쟁의 목표였다. 그래서 의사의 생애에 점철된 항일사(抗日史)는 오직 행동을 통한 투쟁으로 일관됐던 것이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백형철(白亨喆)

자는 상옥(相玉), 호는 용성(龍城), 16세때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수도(修道)를 한 뒤 전국 사찰(寺刹)을 주유(周遊)하였다. 3 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民族代表)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서명(署名)하고, 1년 6개월간 복역(服役)했다. 출옥후 불교종단(佛敎宗團)의 정화(淨化)를 위해 노력, 대처승(帶妻僧)의 법통계승(法統繼承)을 인정하는 일본의 종교정책(宗敎政策)에 반대했으며. 한편 불교(佛敎)의 대중화 운동을 위해 저술(著述)에 힘썼고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했다. 1962年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백인제(白仁濟)

1898(광무 2) - ?. 의사(醫師). 평북 정주(定州)출신.
인제대학교의 모태인 백병원을 설립하신 백인제 박사는 평안북도 정주군 남서면에서 부친 백희행(白禧行)씨의 7남매중 셋째 아들로 1898년 1월 28일출생하였다.
백인제 박사는 1915년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재학하던중 1919년 3월1일 항일구국투쟁이 일어나자 학생대표 김택원 등과 같이 가담하여 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받고 옥중에서 10개월간 고생하였다. 옥고를 치르신 후 경성의학전문학교 복학이 허용되어 1921년 동기생들보다 1년 늦게 학교를 졸업하고 그를 총애하던 일본인 교수들의 추천으로 모교 외과교실에서 연구생활을 시작하였다.
1928년 동경제국대학으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30세란 젊은 나이로 경성의학 외과주임교수에 임명되었다. 40세가 되던 1936년에는 외과학연구 차 프랑스, 독일 등을 순회하고 미국으로 가서 MAYO진료소가 의술로 벌어들인 돈을 의학연구와 교육에 헌납하는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게 되었다. 또한 펜실베니아 체스타병원에서 근무하며 개업을 하던 송재 서재필 박사를 만나면서 백박사는 조국의 독립에 굳은 의지를 다진다.
그 후,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주임교수로 병원장을 겸하며 서울의사회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46년 11월에 백박사는 해방된 조국에 대한 봉사로서 전재산을 기부하여 공익재단법인으로서는 제1호인 백병원을 창설하고, 대한외과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북으로 납북되었다.
백인제 박사는 의학계에 남긴 학문적 업적 또한 뛰어나다. [소량혈청중의 칼슘 및 인산의 정량법에 관한 연구], [실험적 구두병에 관한 연구] 등의 수많은 논문과 우리나라 의학계의 지도적인 많은 인재들을 양성했다.
특히 백인제박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수혈을 시작한 의술인이기도하며 일제하에서 한국의술인 양성에 힘쓴 외과학의 개척자이기도 하였다. 백인제 박사의 민족정신에 관한 근원은 오산중학시절에 형성된 것으로 보아지며 당시 교사인 춘원 이광수와 남강 이승훈의 훈도와 감화를 받았다.
"인술제세(仁術濟世)"라는 건학이념도 이때 유래된 것으로 도산 안창호선생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백박사의 측근들은 추측하고 있다. 재단 설립자인 백인제 박사는 명백한 민족주의자이며 인본주의자이기도 하다. 한국인, 일본인을 가리지 않고 환자는 환자로서 의사가 치료할 책무를 다함은 그가 민족주의자임을 내세워 의사임을 잊지않는 고귀한 인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백인제 박사가 숙원했던 "인술제세(仁術濟世)"의 이념이 종합대학교로 발전된 "인덕제세(仁德濟世)"로서 구현되어 나타났다.
백인제 박사의 설립이념과 그의 애국적 행적은 곧 인제인을 민족사랑의 실천의 장으로 인도할 것이다.

백정현(白正鉉)

1917 - 1946
독립운동가. 평남 용천(龍川) 출신. 1939년 중국에서 한국청년 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 1940년 중국 중앙전시국사 간부훈련단(中央戰時軍事幹部訓練團) 제4단 한청반(韓靑班) 제2기생으로 졸업, 1943년 유격활동 및 지하공작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백인해(白仁海)

? - 1921
독립운동가. 호는 심재(審齋), 평북 태천(泰川)출신, 한일합방 후 아버지를 따라 남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 독립단(獨立團)에 가입하여 국내전권위원(國內全權委員)으로 활약했다. 1921년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 관공서의 파괴활동을 벌이다가 의주군 고관면 춘곡동(義州郡 古館面 春谷洞)에서 일본경찰 경부(警部) 후꾸찌(福地)와 한국인 순사 장형호(張瀅浩)를 만나 격투하다가 동지 이지중(李芝仲)과 함께 순국했다.

백인수(白麟洙)

호는 갑운(甲雲), 학문이 뒤어났고 효성이 지극하여 용인에 있는 세조 비 평택임씨 묘에 당시의 세도가가 투장하여 수천 자손이 10여년간 소송을 하였으나 파지 못하였는데, 6월에 엄우가 내릴 때 몇몇 장정을 인솔 발굴하고 용인현에 자수하니 경기감사가 그의 효심에 감동하여 흥덕에 3년간 안치시켰다.
그 후 1905년 10월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목을 끊어 자결하려 했으나 옆 사람의 구원을 받아 고향에 와서 두문불출하다가 1910년 합방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재차 목을 끊고 자결하였다.

백낙준(白樂濬)

1895 - ?
교육가 정치가. 호는 용재(庸齋), 평안북도 정주 출신. 1922년 미국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1925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 해 미국 예일대학 대학원 수료와 동시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48년 미국 파크대학에서 신학박사, 1954년 미국 스프링필드 대학에서 인문학박사, 1958년 미국 디포대학에서 법학박사, 1965년 연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 1938년 영국황가역사학회회원이 되었으며 1946년 연세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대한소년단 총재, 1949년 서울로터리클럽 회장을 거쳐 1950년 문교부장관에 취임하여 6 25동란 중의 교육문제 해결에 진력하였다.
1953년 서울시교육회장, 1956년 대한교육연합회장에 선임되었으며 4 19의거 이후 참의원에 당선 참의원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연세대학교 명예총장에 추대되고 연세대학교 재단이사를 역임하였으며, 그후 국사편찬위원, 한글학회 이사 등을 지냈다.
1969년 통일원 고문회의 의장을 거쳐, 고문으로 활약하고 1971년 도산기념사업회장, 전군신자화후원회장에 추대되었다.
1980년 국정자문위원이 되었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백남준

호암상 수상한 백남준씨
전인미답인 비디오아트의 길을 걸으면서 세계적 미술상(93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아 그 업적과 실력을 인정받았던 백남준씨가 국내의 권위있는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10월 뉴욕에 한국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개최한 복합문화제였던 나이맥스전시나 지난93년 자신이 25만달러를 내놓아 미국 휘트니비엔날레 한국유치에 공헌한 일도 그중 일부다. 당시까지 미국밖을 한번도 나간 일이 없는 휘트니 비엔날레의 한국유치는 뉴욕미술계에서도 화제를 끌며 백씨의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지난 84년 뉴욕, 파리, 베를린, 서울에 생중계된 우주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국내에 크게 소개된 백남준씨는 그후 국내활동폭을 넓혀 최근 미술계의 몇몇 굵직한 사안들의 막후에 그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조선일보 1995/3/23)

 

"샤롯 무어맨과의 행위예술"
WNET-TV/Channel 13, New York, May 1971


TV Buddha
113x94x51 cm, 1988
(Photo Courtesy Gallery Hyundai)



(Photo Courtesy Carl Solway Gallery)

 

백남준미술관 건립추진위원회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전시회 목록

  • Nam June Paik. Electronic Art, Galeria Bonino, New York 1965
  • Nam June Paik. Electronic Art II , Galeria Bonino, New York 1971
  • Nam June Paik. Videa ‘n’ Videology 1959-1973, Everson Museum of Art, Syracuse(N.Y.) 1974.
  • Nam June Paik. Werke 1946-1976. Musik-Fluxus-Video Kolnischer Kunstverein, Koln
  • Nam June Paik. Videa, Galerie Watari, Tokio 1980
  • Nam June Paik. hrsg. von John g. Hanhardt,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1982
  • Nam June Paik. Tricolor Video, Muse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1982.
  • Nam June Paik. Mostly Video, Tokyo Metropolitan Art Museum, Tokio 1984.
  • Nam June Paik. Time collage, Galerie Watari, Tokio 1984
  • Nam June Paik. Art for 25 Million People. bonjour, Monsieur Orwell. Kunst und Satelliten in der Zukunft, hrsg. vom Berliner Kunstlerprogramm des DAAD, Berlin 1984
  • Nam June Paik. Bye Bye Kipling, Galerie Watari, Tokio 1986
  • Nam June Paik. Family of Robot, Chicago International Art Exposition, Carl Solway Gallery, Cincinnati 1986
  • Nam June Paik. Video Works 1963-88, Hayward Gallery, London 1988
  • Nam June Paik. La fee Electronique,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Paris
  • Nam June Paik. Beuys Vox(1961-1986), Won Gallery / Hyundai Gallery, Seoul 1990
  • Nam June Paik. Video Time-Video Space, 1991-92 Kunsthalle Basel

    백남준의 어록
  • World avant-garde and music. 1,2. Discussion by Nam June Paik, Isamu Kurita, Sakon Soh, oshi Ichiyagi, Yuji Takahashi. Chairma; Makoto Moroi. Ongaku Geijutsu, vol 21, no. 8,9 (Aug., Sept. 1963)
  • Non-televisional development of TV; homage to Mr. Shuya Abe, a futuristic video-system engineer. Speech by Nam June Paik, ed. by takahiko-Ilmura. SD〔Space Design〕, no. 64(Feb.1970)
  • Time in the noe-glacial period. Dialogue by Nam June Pail and Seigow Matsuoka. Yu, 1013〔no.27〕 (June 1980)
  • To the video world. An Interview with Nam June Pail by Hiroshi Kawani. Bijutsu Techo, no.471,472(Oct, Nov. 1980), pp. 134-155, pp.186-199
  • New Direction of art; Nam June Paik's lecture at the American Center, Tokyo. (excerpt) Video Journal, no.316(Oct 1,1980)
  • Time is not money; Nam June Paik's lecture at the Sony alon. (excerpt) Video Journal, no.349(Spet.1,1981)
  • Seizing the poetric moment, Dialogue by Nam June Paik and Shuntaro Tanigawa. Image Forum, vol.2, no.3(Jan. 1981)
  •  

    백남준의 글

    1958

    “The Bauhaus of Music”; The Twelve Tone Mannerism.” Ongaku Geijutsu, Tokyo. “The Music of 20’s Century”. Chayushinmun, Seoul.

    1959

    “Serie, Chance, Space.” Ongaku Geijusto, Tokyo.

    1961

    Apres Serie. “ Ongaku Geijusto, Tokyo. de-collage, 3, cologne. Includes: “ About Music “ ; “Exposition of Music”; “Chronicle of a Beautiful Paintress (dedicated to Alison Knowles)” (composition).

    1963

    To the ‘Symphony for 20 rooms.’” An Anthology, ed. LaMonte Young. New York: LaMonte Young and Jackson MacLow. Reprinted, 1970.

    1965

    “Pensee 1965.” Studen (exhibition catalogue). Wuppertal : Galerie Parmass; Hamburg:Hansen and hansen.

    1966

    “Experiments with Electronic Pictures.” Fylkingen Bulletin International (Art and Technology II), 2, Stockholm,

    1968

    Answer to question “Qui etes vous?” Le Daily-Bul, 12, La Louvriere, Belgium.

    1969

    “Destroying All Notations.” Notations, ed. John Cagee. West Glover, Vt.: Something Else Press. “Uber Pussy TV.” Kalendar ‘69: Electronic Art, Dusseldorf.

    1970

    “Confessions of a ‘Cafe Revolutionary,’ May, 1969.” Software (exhibition catalogue), New York : The Jewish Museum. “Generation Collage.” KLEPHT, Swansea. “Seven Billion Dollar.” Arts in Society, 7, no. 3, “The Most Profound Medium.” Vision and Television (exhibition catalogue). Waltham, Mass.” Rose Art Museum, Brandeis University.

    1971

    “Video Commune.” P.C.A., ed. Walter Aue. Cologne: DuMont Schauberg.

    1972

    “Communication and Art of Communicating as Art” (letter to Ernst Brucher). Kunst-Praxis Heute, ed. Karin Thomas, Cologne: DuMont Schauberg. “Nam June Paik- Charlotte Moorman.” Flash Art, Milan, May/July 1972. “Memories of Munich.” Neue Musik:Music/Film/Slides/Light-Festival (special issue for Arts Program of the 1972 Olympic Games in Munich;ed. Josef Anton Riedl), Munich “My Symphonies” (includes the first five symphonies of Nam June Paik). Source/Music of the Avant(Iarde, 2(ed. Ken Friedman), Sacramento, California, “Ken Deway 1934-11972” (obituary). The Village voice, August 10, 1972. Two letters to Hans Otte. Pro Musica Nova(festival Program ). Bremen;Radio Bremen.

    1973

    “TV Chair.” New York Collection for Stockholm (exhibition Catalogue), Stockholm: Moderna Museet.

    1974

    “Music is a Mass Transit.” Ear magazine, 18. Nam June Paik: Videa ‘n’ Videology 1959-1973(exhibition catalogue),ed, Judson Rosebush. Syracuse, N. Y. : Everson Museum of Art. Since this book lacks numerical pagination, for the reader’s convenience pagee numbers have been assigned, page I being the Foreword. Includes the following: “A-Day Project” (1972-73), “ Afternote to LECTURE ON NOTHING” (1966), “Binghamton Letter” (1972), Letters to John Cage(1964-72), “New Projects” (1972-73), “Projects for Electronic Television” (1965), “Versatile Color TV Synthesizer” (1969), “Video Synthesizer” (1969), “Videotape Monthly Magazine” (1967), Also include the following reprints: “Acceleration of Kalendar” (1969, excerpt), “Afterlude to the Exposition of Experimental Televisiion 1963, March Galerie Parnass” (1964), “Communication-Art”(1972), “Electronic TV and Color TV Experiment” (1964), “Electronic Video Recorder” (1965), Essay(1966), Essay for “The Machine” Exhibition revised (1968-70) Excerpt from a letter to John Cage(1969) “Expaned Education for the Paper less Society” (1968), “Gala Music for John Cage’s Birthday” (1962, composition), “Global Groove and Video Common Market” (1973), “New Ontology of Music” (1962), “Norber Weiner and Marshall MeLuhan” (1967), “Participation TV, TV Bra for Living Sculpture” (1969), “Simulation of Human Eyes by 4 Channel Stereo Video Taping”(1970), “TV tortured the intellectuals for a long time.....” (1971), “Utopian Laser TV Station” (1966), “Video Synthesizer Plus” (1970), “WCIA Calling” (1971)

    1976

    “Electronic Sistine Chapel.” Catalog Dodspringet Charlottenborg, Denmark: Svend Hansen. Nam June Paik:Werke 1946-1976, Musik-Fluxus-Video(exhibition catalogue). Cologne: Kolnischer Kunstverein. Includes the following: “Center for Experimental Arts” (1966, letter to Alan Kaprow); “Etude for Pianoforte”(1976); “Input Time and Output Time” (1976); Letter to Wolfgang Steinecke (1959); “Media Planning for the Post-industrial Society” (1974); “Robot Opera” (1965, composition); “Scenario” (1963); “Simple” (1962, composition). Also includes the following reprints: “Afterlude to the Exposition of Experimental Television 1963, March, Galerie Parnass” (1964); “Autobiography” (1965) ; “Bagatelles Americanes” (1962,composition); “Electronic Video Recorder” (1965); “Danger Music for Dick-Higgins” (1962, composition); “Halftime” (1964, composition); “Moving Theater No. 2” (1964, composition); “Norbert Weiner and Marshall McLuhan” (1972); Program note for “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 (1963); “Read Music- ‘Do it Yourself - Answer to LaMonte Young” (1963, composition); “Serenade for Alison” (1962, composition); “Symphony no.5” (1965, composition;excerpt); “Videotape Monthly Magazine” (1967); “Young Penis Symphony” (1962, composition). “Morning Three, Evening Four.” Tracks, 3(Fall 1977). Essay. Flash Art, Milan, January 1979. “Random Access Information.” artforum, 19(September 1980).

     

    백남은(1837~1888)백남규( ?  ~1886)

    자는 문예, 호는 정석이다.백남은과 백남규 형제는 어려서 부친상을 당하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애통해하였다.

    이후 홀어머니를 성심으로 섬기고 모셨다.집이 매우 가난하여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 팔거나 물고기를 잡아 봉양하였다.

     

    백남은과 백남규 형제는 맛있는 음식이나 고기, 과일 등은 어머니께 먼저 올렸다.

    어머니가 칠순이 되어 위독하게 되자 의복을 벗지 아니하고 음식도 제때 먹지 않으며 밤을 새워 간호하였다.

     

    약은 먼저 맛보았고 증세가 악화되자 변까지 맛보았다.

    병이 악화되자 백남은은 단지하여 피를 드렸더니 숨이 트였으나 이후

    삼 일만에 돌아가셨다.백남규는 병술년 1월 12일에 세상을 떠났고, 백남은도 두 해 뒤인 무자년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백 낙 인

    백낙인이 나이 15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것에 하늘도 감동하였다.

    원래부터 집이 가난하여 고령의 부모님을 보양할 자산이 없었다. 그럼에도 밥상에 먹을 만한 음식이 있으면 우선 어머니께 갖다드렸다.

    아침저녁 부모님을 돌보고 병이 들면 곁은 떠나지 않고 간호해 드렸다.

    혹 종기를 앓으면 고름이 나오도록 빨아드렸다.

     

    부모가 불치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였다. 일설에 젖 먹는 개 사골이 가장 좋다는 말을 듣고 팔방 사방으로 다녔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이에 정화수를 떠 놓고 하늘에 기도하였는데 솔개 두 마리가 마당에 개 뼈를 떨어뜨리고 갔다.

     

    이를 불에 볶고 갈아서 복용하였더니 다음 날 병이 쾌차하였다. 부모가 설사병으로 오줌 누는 것이 시원치 않아 혀로 인분을 닦아 내니 삼 일이 지나 병이 나았다.

     

    부모 병이 오래되어 돌아가시게 되자 스스로 관을 만들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부고를 전할 지경에 이르자 하늘에 기도하였는데 부모가 잠시 눈을 뜨고 식구들을 마지막으로 둘러봤다고 전한다.동리 사람들이 관청에 여러 차례 호소하였지만 정려를 받지는 못하였다.

     

    후에 유생들이 다시 내용을 올려 그 영향으로 통정대부로 추증되었다.

    백 기 진(白璂鎭)

    호는 송재, 아버지는 백동근이다.백기진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지극히 봉양하였다. 아버지가 삼 년간 병중에 있자 먼 곳에 있는 약을 구하기 위해 깊은 밤에도 혼자 험한 고개를 넘고 넘었다.

     

    그때마다 무서운 짐승들이 출몰하였으나 그 효성을 알고 물러가곤 하였다.

    처 해주 오씨는 오운겸의 딸이다. 출가할 때부터 부덕(婦德)을 겸비하고 시부모를 지성으로 섬기었다.

     

    시부모에게 병이 나면 밤마다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하늘을 향해 기도하였다. 매일같이 때를 거르지 않고 정성과 노력으로 아침저녁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다.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여 곡을 하였고 예의로써 제사를 치렀다.

    관청에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여 나라의 은전을 입지 못하였지만, 다행히 여러 사람이 뜻을 모아 효행비석을 세웠다.

    백 재 수(白在洙

    1829~1880)

    자는 문여이다.

    백재수는 성품이 선하고 어질며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었다.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 살피고 맛있는 것은 먼저 드시게 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 상을 치르고 묘 곁에서 삼년을 지냈다.

    백 낙 려(白樂侶)

    자는 영기, 아버지는 백재수, 관직은 의금부도사에 이르렀다.백낙려는 성품이 순하고 인정이 두터웠으며 부모를 봉양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다.

    부모상을 당함에 장례를 잘 모시고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삼 년간 아침저녁으로 문안하였다.

    백 남 하(白南夏)

    자는 치양, 호는 포암, 아버지는 백낙려이다.

    백남하는 몸가짐이 단정하고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며, 언제나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의 오랜 병환으로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밤낮으로 약을 구해 달여드렸다.

     

    그러나 백약이 효과가 없자 하늘에 어머니의 병환이 낫기를 기도하였다. 위급함이 극에 이르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넣으니 소생하는 기적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대효(大孝)라고 칭송하였다.

    백 학 기(白鶴基)

    호는 휴당, 아버지는 백남하이다.백학기는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11년간 병석에 누웠는데, 근원을 따지지 않고 영약을 구해왔다.

     

    백약이 효과가 없자 백사가 가장 좋은 약이라는 의원의 말을 듣고 맨발로 뛰어나가 뱀을 찾았다. 그런데 뱀이 스스로 준비한 망 속에 들어와 있었다. 이로써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다.

    백 중 휘

    (1771~1834)

    자는 원, 아명은 증진이다.모친상을 당하였지만 홀아버지 봉양으로 시묘살이를 할 수 없었다.

    이에 밤마다 성묘하였는데 항상 대호(大虎)가 나와 가는 길을 호위하였다. 성묘하며 눈물이 떨어진 곳에는 다시 풀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누워 계실 때 밤낮으로 약을 달여드렸는데 갑자기 집에 불이 났다. 그가 어쩔 줄 몰라 오로지 하늘에 불이 꺼지게 해달라고 기원하였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불이 꺼졌다.

     

    조정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고 조봉대부에 제수하며 정려를 명하였다.

    백 동 규(白東奎,

    1784~1858)

    자는 덕은이다.백동규는 심성이 선하고 효심이 깊었다.

    마음을 다하여 부모를 섬겼으나 집이 본래 가난하여 변변한 음식조차 드리기가 힘들었지만 부지런히 일하여 항상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애훼하는 바가 컸다. 삼 년간 조석으로 묘에 올라 곡하였는데, 무릎 닿는 곳이 구덩이가 되었다.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도 모친상과 같이 하여 마을에서 진효가(眞孝子)라고 칭송하였다.

    기 타 효 자

    백사학(白師學, 1740~1810)

    백낙윤 처, 밀양 박씨(1863~1893)

     

    ※참고서적 동몽 교관 「수원백씨대동보」

    《한국효문화진흥원의 한국효행열전Ⅰ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