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종중 · 종인동정
ㆍ작성자 휴암종중
ㆍ작성일 2022-02-23 (수)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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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동 사우 중건후 청액소(龍洲洞祠宇重建後請額疏)

鄭 在 心

 

엎드려 아뢰나니 유()를 숭상하고 도()를 중()히 함은 제왕들의 성스러운 절목이며 무너짐을 닦고 궐()함을 보완함은 성대(聖代)의 미전(美典) 입니다.

우리나라는 전후(前後)하여 유현(儒賢)의 사당(祠堂)을 세워서 향사(享祀)를 올림이 곳곳에 있어 서로 바라보이며 혹은 도덕(道德)의 상응(相應)으로 인하여 그 사우(祠宇)에서 아울러 제사하기도 하고 혹은 사림(士林)들이 상소(上疏)로 절규하여 그 사당을 새로 지어서 별도로 향사함이 솟구쳐서 팔방(八方)에 보이고 들리어 일대(一代)의 풍성(風聲)을 세운 것은 오직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현인(賢人)을 높이고 도의(道義)를 옹호하며 사문(斯文)을 부식(扶植)하려는 성덕(盛德)이요 미의(美意)입니다.

오직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요순(堯舜)의 성심(聖心)을 가지고 주공(周公)과 공자의 학문을 힘쓰시어 부지런하며 내전(內殿)에서도 성현(聖賢)의 학문이 아니면 읽지를 아니하시고 염염(念念)히 추모하시어 능히 계슬(繼述)의 도를 진선(盡善) 하심은 무릇 을 빛내고 선현방의(先賢方義)를 존중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일심(一心)으로 행해 나가며 극진(極盡)을 다하신다면 만대(萬代)의 문치(文治)가 실로 이에 근본이 될 것이니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도순(蹈舜)하고 작흥(作興)치 아니함이 없을 것이며 기꺼이 유교(儒敎)의 크게 빛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빛나지 아니하며 어찌 성사(盛事)라 아니하겠습니까?

따라서 엎드려 가만히 생각하니 신() 등이 살고있는 땅은 곧 기내(機內)의 파주(坡州)로서 지금(至今) 고을 안의 각 서당(書堂)에서는 오직 효제충신(孝悌忠臣)의 양()됨을 알고서 차() 마시고 밥먹을 줄 안 자라면 이는 선정(先正) () 충숙공 백인걸(忠肅公 白仁傑)과 문성공 이이(文成公 李珥)와 문간공 성혼(文簡公 成渾) 등 삼() 선생의 도덕행의(道德行誼)가 세상의 표준 됨을 힘입어 훈도융액되어 사람들께 깊이 들어간 연유입니다.

오직 이 삼현신(三賢臣)들은 한때에 같이 나서 선묘(宣廟)의 제우(際遇)를 만나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여 문명의 빛난 정치를 극찬(克贊)하다가 만년(晩年)에 고향으로 물러 나와 학문을 강()하고 도()를 논하여 멀리 정암(靜庵) · 퇴계(退溪)의 유서(遺緖)를 이어 왔은즉 그 넓은 공()과 큰 덕()은 향선생(鄕先生)을 제사하는 사우(祠宇)의 뜻에 비하지 못한 것이 명백(明白)하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죽은 후에는 각각(各各) 수간(數間)의 사당(祠堂)을 짓고서 숭봉(崇奉)의 예()를 전일(專一)케 하였으니 충숙공(忠肅公)을 향사(享祀)한 곳은 옛날 인묘무진년(仁廟戊辰年)에 월롱산(月蘢山)의 동쪽 휴암(休岩)의 밑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서원촌(書院村)이라는 곳에다 창건(刱建)했는데 이는 실()로 충숙공이 물러난 후에 은거하던 때의 땅이며 집 뒤에는 큰 바위가 우뚝 서 있어 석인(碩人)이 홀()을 안고 있는 형상 같고 천()길의 벽을 깎아 세운 것 같아서 충숙은 이를 취()하여 호()를 만들었음으로 곧 이땅에다 그 사우(祠宇)를 지었던 것입니다.

문성(文成)은 누대의 선영(先塋)이 그 자운산(紫雲山) 밑에 있었으며 문간(文簡) 은 일생(一生)동안 살아왔으니 즉 이 파산촌중(坡山村中)은 옛날 각각 지팡이와 삼신을 신고 소요하던 땅이라 공경히 모시어 존사(尊祀)의 도리(道理)를 다하려고 기둥까지 세웠는데 한번 사류(士類)들 간()에 새 의견이 나오기를 청송(聽松) · 휴암(休庵) · 율곡(栗谷) · 우계(牛溪)의 네 선생(先生)은 덕업(德業)의 성()함과 동향(同鄕)에서 병생(並生)함이 모두 우연한 일이 아니니 한 사우(祠宇)에서 합향(合鄕)하자 하여서 예의(禮儀)로 볼 때 그럼직하여 드디어 본주(本州)의 호계(虎溪)의 한 구역에다 사원(祠院)을 짓고 사선생(四先生)의 위패(位牌)를 모시기로 하였음으로 드디어 월롱(月龍)의 역사(役事)를 중지하고 호계서원(號溪書院)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청송(聽松)은 성혼(成渾)의 아버지인 수침(守琛)의 호()이며 율곡(栗谷)은 이이(李珥)의 호(), 우계(牛溪)는 성혼(成渾)의 호()이옵니다.

이 때에 문성(文成)과 충숙(忠肅)은 과연 먼저 호계서원(號溪書院)에 합사(合祀)하였고 성() 선정(先正)의 부자(父子) 위판(偉版)은 그 자손들의 의논이 파산(坡山)은 곧 장루(杖屢)의 땅이라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다 하여서 이로 인하여 그 병정(倂亭) 하자는 논의는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연구(年久)한 후에 호계서원이 허물어지게 되자 사론(士論)은 또한 사현(四賢)을 이미 동제(同祭)치 못했으니 차라리 각각 옛터로 갈 수 밖에 없다 하여서 문성(文成)의 위판(位版)은 자운사(紫雲祠)로 봉안(奉安)하고 충숙(忠肅)은 예()로써 당연히 월롱(月蘢) 의 옛터로 봉안해야 하나 사력(事力)이 미치지 못하여 갑자기 양원의 일시(一時) 병수(倂修)가 어렵게 되었음으로 우선 임시로 파산원(坡山院)에 모시게 되어 드디어 청송선생과 동서로 대좌(對坐)시키어 손님과 주인의 위치(位置)를 이루었으니 이는 곧 선정(先正) ()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소정(所定)한 예()입니다.

대개 이()와 혼()은 다 같이 인걸을 스승으로 삼고 도의 큰 근원을 얻어들었으되 혼()은 인걸(仁傑)의 문하(門下)를 출입(出入)한 지 30년 동안 좇아 섬김이 더욱 돈독하여서 의()로는 사생간(師生間)이요 은혜로는 부자(父子)간 같았기 때문입니다.

대저(大抵) 백선정(白先正)을 처음 호계(虎溪)의 율곡서원에서 향사(享祀)를 올리다가 후에 파산청우(坡山廳牛)의 서원으로 옮겨서 비록 향현(鄕賢)들이 동사(同祀)의 의()에는 해롭지 않으나 만약 자운(紫雲) · 파산(坡山)의 양원(兩院)에서 각기(各己) 옛터로 옮기어 독향(獨享)하여 높임에 비()하면 싫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월롱의 옛 사우(祠宇)를 오래도록 중건(重建)하지 못하여 선생의 위판(位版)은 남의 사우(祠宇)에 붙여있게 되었으니 사론(士論)의 슬픔과 우울함은 말할 수 없고 사문(斯文)의 결례는 더욱 어떠하였겠습니까?

지난 을사년(乙巳年)에는 절효(節孝) 성수침을 파원(坡院)에 추배(追配)하니 위차(位次)의 동서 상하가 이미 문정(文正)의 정()한 예()가 있으니 청() · ()를 주인으로 해서 동벽(東壁)에 위치하고 절효(節孝)가 새로 배향되면 청송의 다음에 위차(位次)하여야 마땅하건만 그 위판(位版)을 배열함에 있어 선정(先正)의 이미 정()한 식()은 없어지고 드디어 절효(節孝)가 충숙(忠肅)의 위에 올라갔으니 주빈동서(主賓東西)의 의()가 여지없이 타파(打破)되었으므로 을사년(乙巳年) 가을에 신() ()이 소()하여 바로 고쳐줄 것을 청했으나 윤가(允可)를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 등은 이에 각기(各己) 심력(心力)을 다하여 재료(材料)와 도구(道具)를 조금씩 모아서 드디어 월롱산(月蘢山) 밑전에 말하던 서원촌(書院村)이라는 옛터에 옛날의 주춧돌과 벽돌을 그대로 써서 수간(數間)의 집을 건립하고 백선정(白先正)의 위판(位板)을 이봉(移奉)하여서 일()은 파원(坡院)에서 자리를 잃은 꺼림을 풀어버리고 일()은 옛터에다 존향(尊享)하는 전례(典例)대로 하려고 했으나 감()히 독단(獨斷)치 아니하고 글을 예조(禮曹)에 올렸더니 예조(禮曹)에서는 파원(坡院)의 위차(位次)가 이미 우암(尤庵)의 정례(定禮)를 위반했다 하여서 구지(舊址)를 개척하여 새로 사우(祠宇)를 지어서 이봉(移奉)한다는 거사(擧事)는 사전(祀典)에 있어서 첩설(疊設)의 혐의가 없겠는가? 위차(位次)에 있어서는 구애(拘碍)됨이 없음으로 사리(事理)를 헤아려서 정성껏하고 온당(穩當)케 하라고 제()를 내렸습니다.

! () 등 삼현(三賢)에게 하사(下賜)함을 받은 것이나 삼현(三賢)에게 경모(景慕) 함이 피차(彼此) . 침천(琛淺)의 차별이 없었건만 이()와 혼()은 원우(院宇)를 각설(各設)하고 예모(禮貌)에 결함이 없는데 인걸은 아직 수간(數間)의 전향(專享)할 곳이 없으니 한결같은 존봉(尊奉)의 도리(道理)에 어긋남이 있으며 이는 진실로 백년간(百年間)의 없든 글이라 오랫동안 모든 선비들의 뜻도 우울하더니 이제 사우(祠宇)가 이루어짐에 당하여 그 숭봉(崇奉)한 바의 전례(典禮)를 어찌 자원(紫院) · 파묘(坡廟)와 더불어 조금이라도 이동(異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서원(書院)의 금령(禁令)은 조령(朝令)에 있으나 그 설치를 금()하는 것은 신창(新創)과 첩설(疊設)을 말함에 불과(不過)한 것입니다. () 등이 세운 사우는 곧 백년전에 이미 역사(役事)를 시작했으니 굳이 신창(新創)이라 논()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가까운 곳에 안녕(安靈)하는 곳이 없으니 역시 첩설(疊設)이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항차 생뢰(牲牢)의 하사(下賜)와 결복(結卜)의 절수(折受) 생도(生徒)의 정액(定額) 등 이미 열성조(列聖朝)의 은전(恩典)을 받음이 사액(賜額)한 서원과 다름이 없는 즉 조가(朝家)에서는 이미 원향(院享)을 허락했음이 교연(皎然)하게 밝을 뿐 아니라 전()에는 옥우(屋宇)가 이루어지지 못했음에도 오히려 은전(恩典)을 같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 등의 억울한 탄식을 어찌 극하다 하겠습니까? 이에 감히 외람되고 참월함을 피()하지 아니하고 발을 싸매고 연명으로 호소하오며 엎드려 성명(聖明)께 비옵나니 굽어보아 주시고 양해(諒解)하시어 급히 유사(有司)의 신()에게 명()하시와 특히 두 글자의 액호(額號)를 베푸시어 사문(斯文)을 신()하게 하시고 흥정(興情)에 부응(副應)하게 해주신다면 대원(大願)을 이길 수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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